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고종 황제의 ‘헤이그 밀사’ 파견을 막후에서 강력하게 지원했고,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다 추방당해 미국으로 건너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다 한국 땅에 묻힌 미국 국적의 '제4의 헤이그 밀사'인 한국 독립운동가 호머 B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의 서거 67주기 추모식이 12일 성대하게 치러졌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는 이날 오전 11시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100주년선교기념관에서 헐버트 박사의 추모식을 갖고,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고인의 살아 생전 발자취를 기억하고 넋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올해 67주기 추모식은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유공자유족회, 마포구청이 후원했으며, 추모식에는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 박유철 광복회장과 애국지사, 마크 내퍼(Marc Knapper) 주한 미국 부대사, 이재정 경기도교육감,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권재일 한글학회장, 조혜자 이승만대통령 며느리 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사, 추모공연, 특별 강연, 기도 및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은 이날 추모사에서 “어느 한국인보다도 한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박사의 영전에 한없는 존경심과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명복을 빈다”며 “헐버트 박사의 박애 정신, 애국청년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자유와 번영 위한 세계 중심 국가가 됐다. 정말 감사하다”고 강조했다.
또 “이제 우리는 헐버트 박사가 보여준 시대를 초월한 정신과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오늘날의 갈등과 분열, 대립을 극복하고 국민이 행복한 나라, 통일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힘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마크 내퍼 주한 미국대사관 부대사도 추모사를 통해 “헐버트 박사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엔) 외국인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헐버트는 한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어 “잘 만들어진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의무가 현재 우리에겐 남아있다”고 언급했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올해는 헐버트 박사가 우리나라에 온 지 130년이 된 해”라며 "헐버트 박사는 3000만 겨레의 존경과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거의 존재는 물론 업적조차 잊혀져버렸다. 헐버트 박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장에서 너무 많은 일을 대신해줬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아직도 헐버트 박사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 너무 가슴 아프다”라며 “기념회는 헐버트 박사를 세계에 널리 알릴 것이다. 이것은 곧 한국을 알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헐버트 박사가 우리나라에 온 지 올해로 130년이 됐다. 이를 기념하는 이날 추모식에서는 헐버트 글모음집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의 역사적 의미를 김종택 한글학회 이사장이 강연했다. 헐버트 박사의 일생을 담은 영상을 공개하고, 류지원 경일대학교 교수는 헐버트 초상화를 헌정하기도 했다.
또 헐버트 박사가 ‘아리랑’을 채보한 지 120년이 되는 해도 2016년이다. 이를 기념해 송옥자 문경새재아리랑 전수자가 ‘헐버트아리랑’을 노래했다.

미국인인 헐버트 박사는 1863년 미국 버몬트주에서 태어났다. 1886년 23세의 나이로 첫 서양식 교육기관인 대한제국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내한하여 외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외교 자문을 맡아 광무황제(고종)를 보좌하였다.
1890년 세계사회지리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내고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문자사에서 한글보다 더 간단하게, 더 과학적으로 발명된 문자는 없다”고 확언했다.
헐버트 박사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 되자 고종의 밀서를 지참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 을사늑약의 무효와 대한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이듬해 ‘한국평론’ 발간을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을 폭로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897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호소하는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을 도왔고, 미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일제에 의해 쫓겨난 뒤 1909년 미국에서 집필한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서문에 “나는 1800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웠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썼다.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앞두고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방한했다가 일주일 뒤인 8월 4일 86세 일기로 서거했다. 헐버트 박사는 별세하기 직전 “웨스터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8월 11일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이 치러져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헐버트 박사의 공훈기려 1950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 2014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한편 아리랑을 말하면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이름도 헐버트 박사다. 입으로만 전해지던 아리랑을 1896년 5선지에 악보로 처음 옮긴 주인공이다.
헐버트 박사가 채록한 아리랑은 고종이 즐겼다는 아리랑, 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삼은 바로 그 아리랑이다. 아리랑 권위자인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오랜 세월을 구비전승(oral-transmission)으로 내려오던 아리랑을 재생 가능한 보편적 기보전승(score-transmission)으로 존재하게 한 최초의 기록이자 최고의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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