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미래일보) 공현혜 기자 = 고려 말 장인과 두 사위의 인연에서 시작된 모임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전통과 역사·애국 정신을 함께 계승하고 있어 화제다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700년에 가까운 시간을 견디며 명맥을 이어온 모임이 있다. 바로 강선계(講先契, 회장. 박재양)다. 단순한 친목계를 넘어 세 가문의 역사와 정신, 공동체적 연대를 오늘까지 이어온 보기 드문 전통문화의 산 증언이다.
지난 5월 16일 오전 10시, 울산시 북구 송정동 박상진 의사 송정 역사공원 내 봉산정에서는 제102회 강선계 정기총회가 20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강선계는 옥산 전씨(玉山全氏)·아산 장씨(牙山蔣氏)·밀양 박씨(密陽朴氏) 세 문중 후손들이 700여 년 동안 이어온 친목·우의 모임이다.
그 시작은 고려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의룡(全義龍)의 두 딸이 각각 아산 장씨 장흥부(蔣興膚)와 밀양 박씨 박해(朴晐)에게 출가하면서 장인과 두 사위, 즉 동서지간의 인연이 세 문중의 연대로 이어졌다.
이후 세월이 흐르며 후손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졌지만, 매년 음력 4월 10일 전후로 세 문중이 번갈아 모임을 주최하며 그 약속을 지켜오고 있다.
오늘날까지 이어진 강선계의 가장 큰 의미는 단순한 혈연 유지에만 있지 않다. 공동체적 책임과 역사 의식을 함께 계승해 왔다는 점이다. 강선계는 1923년 기암 김헌주 등이 규약과 서문을 마련하면서 공식 명칭을 갖추었고, 2024년에는 <강선계 백년사>를 발간하며 역사적 체계를 정리했다.

올해 총회는 밀양 박씨 문중이 주최했다. 행사장은 전통의 품격과 역사적 상징성이 어우러진 자리였다. 식전행사로 정가와 가야금 병창 공연이 펼쳐졌고, 박종해 시인(울산문협)의 축시 '숭고한 세의만대에 전승하리' 낭송과 이창언(영남대) 교수의 특강 '강선계의 연원과 현재적 의의'가 이어졌다.
특히 행사 장소가 지닌 역사성도 깊은 울림을 더했다. 봉산정이 위치한 역사공원은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의 생가터에 조성된 공간이다. 대한광복회 총사령으로 활동했던 박상진 의사는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운동을 주도한 울산의 대표적 항일 인물이다. 참석자들은 선조들의 우의뿐 아니라 나라를 위한 희생과 충절의 역사까지 함께 되새겼다.

행사에서 배부된 자료집 역시 눈길을 끌었다. 참석한 회원에게는 김정현(자유기고가)의 '임란의병장 박응성 자료집'에는 임진왜란 당시 세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끝까지 항전하다 순절한 의병장 박응성(朴應成)의 삶이 담겼다.
가족 전체가 나라를 위해 몸을 던졌다는 사실은 강선계가 단순한 문중 모임을 넘어 역사적 가치와 정신을 공유하는 공동체임을 보여준다.
또한 '밀양박씨 송정마을 탐방기'와 박동만(역주)의 '신라시조왕릉비명 병서’ 해석본, 그리고 '임란의병장 박응성 자료집'과 '송정문중 소개지', '밀양박씨 밀직부원군파 중증 소식지' 등을 세 가문의 회원들에게 배부했다. 그러나 이날 행사에서는 전통 계승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박준우 밀양박씨 밀직부원군파 송정문중 부회장은 "우리 세대까지는 명맥을 유지하겠지만 젊은 세대 참여가 부족하다”며 “700년 역사를 이어갈 후배가 줄어드는 현실이 가장 큰 고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 사회에서 문중 문화와 계(契) 문화는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 개인 중심 사회로 변화하면서 혈연 공동체의 결속은 느슨해졌고,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강선계의 역사는 단순히 옛 문화를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서로 다른 세 가문이 700년 동안 신뢰와 예의를 바탕으로 관계를 이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오늘날 공동체 정신의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강선계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단절과 갈등이 일상이 된 시대에 ‘함께 기억하고 이어가는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역사다.
700년 전 장인과 두 사위가 맺은 약속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오래된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있다. 공동체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다음 세대에 남길 것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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