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무의 '영화 읽어주는 남자'] 로컬 시네마 : <이리>

2018.11.12 10:34:40

재중동포 감독 장률, 처음으로 한국을 이야기하다
타인의 시선으로 그리고 동포의 시선으로 '이리'를 들여다보다

(서울=미래일보) 김시무(영화평론가) = 장률 감독의 '이리'(Iri, 2007)는 지난 1977년 11월 11일 21시 15분경 전라북도 이리시(지금의 익산시)에서 발생한 열차 폭발사고 이후 30년이 흐른 시점에서 그 현재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일종의 로컬 시네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화약제조업체인 한국화약에서 제조한 대량의 폭발물을 싣고 이리역 구내에서 대기 중이던 열차가 갑자기 폭발한 사건을 말한다.

수사결과에 따르면, 호송원이 어둠을 밝히기 위해 밤에 켜 놓은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폭발사고가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고로 이리 시민 59명이 사망하고 1,15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647세대 7,8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영화는 그로부터 30년이 지나고 모 방송국에서 30주년 기념행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을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진서(윤진서)라는 이름의 서른 살 처녀인데, 사고 당시 엄마의 배속에 있다가 폭발의 진동으로 인해 미숙아로 태어난 불운한 여자다.

진서는 택시기사인 오빠 태웅(엄태웅)과 함께 경로당에 딸린 허름한 주택에서 사는데, 노인들의 수발을 들기도 하고 동네 중국어학원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하루하루를 영위하고 있다.

오빠는 일을 마친 후면 집안에 틀어박혀서 이리시의 미니어처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진서는 중국인 강사선생에게 개인교습을 받으면서 중국어 배우기에 매우 열심이다. 때로 술까지 함께 마시면서 속내를 털어놓기도 하지만 그녀는 곧 중국으로 떠나고 새로운 선생이 온다고 한다.

이처럼 외견상 평온해 보이는 일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진서의 삶은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 있다. 남들보다 사고력과 분별력이 떨어지는 그녀는 걸핏하면 남자들로부터 강간을 당하여 임신을 하고 유산(流産)을 반복한다.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는 남자들은 그녀의 약점을 잘 아는 주변 남자들이었다. 예컨대 진서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국어학원의 한 남자 수강생은 그녀에게 ‘털모자’를 선물하는 호의를 보이면서 꼬드겨 백주대낮에 그녀를 강간하기도 한다.

경로당을 찾는 노인네들 중에도 호시탐탐 진서를 노리는 한 노인이 있었는데, 진서에게 음심(淫心)을 품었던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같은 동네에 있는 ‘베트남참전전우회’ 소속 멤버들에게 있어서도 진서는 한갓 성적 농락의 대상에 불과했다.

한편 여동생의 거듭된 성폭력 피해에 울분을 참을 수 없는 오빠 태웅은 아예 진서의 불임수술까지 생각해보지만, 이것마저 여의치 않다. 그녀의 판단력 결여 때문이다.

결국 태웅은 소극적인 임신 방지책으로 진서에게 콘돔을 사다주지만, 이는 진서에게 오빠와 동침해도 된다는 쓸데없는 오해만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진서가 반복되는 임신의 후유증으로 거리에서 쓰러지고 마침 같은 동네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가 그녀를 발견하여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사실 영화의 디제시스 상에서 성폭력이 발생했는지의 여부는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지 않다. 다만 퇴근을 하던 오빠 태웅이 집에 있던 외국인 노동자를 보고 경찰에 넘겨버린 것인데, 그 중간 과정이 생략되어 있어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도 있다.

어쨌든 이 같은 일련의 참담한 사건을 겪은 태웅은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동생 진서를 지역 인근의 앞바다로 데리고 가서 물속에 쳐 넣는다. 수장(水葬)을 시킨 셈이다. 그러고는 그동안 정성스럽게 만들어온 이리시 미니어처를 폭죽을 이용하여 폭파시켜 버리고 만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는데, 새로운 중국어학원 선생인 쑤이가 오자 동네어귀 구둣방에 옆에 몸이 젖은 채로 앉아있던 진서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진서가 과연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것일까?

장률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선 무엇보다도 고향 상실성(Heimatlosigkeit)이라는 화두가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 배경으로 삼고 있는 현재 익산이라는 지명은 한 때 이리라는 고유 명칭으로 불리던 평화로운 도시였다. 그런데 그 도시 전체가 아주 한 순간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폭발사고로. 그리하여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미쳐 손을 쓸 틈도 없이 앉은 자리에서 고스란히 고향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이리 사람들은 타지(他地)로 단 한발자국도 이동하지 않고도 고향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던 것이다. 그것은 악몽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 대재앙이후 30년(현재시점 41년)이 흘렀다. '이리'라는 이름을 망각의 강 저편으로 밀어버리고 얻게 된 익산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 안녕들 하신가요?"하고 영화는 묻는다.

■ 김시무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를 거쳐 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학과에서 <라캉의 주체개념 재조명>(2005)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이장호영화연구회' 회장, 부산국제영화제 전문위원(Adviser),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사단법인 한국영화학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지난 3년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맡았다.

저서로는 '영화예술의 옹호'(2001), 'Korean Film Directors: Lee Jang-ho'(Kofic, 2009), '홍상수의 인간희극'(2015), '스타 페르소나'(2018) 등이 있다. 이밖에 시나리오 '물고기 하늘을 날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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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섭 기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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