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시인협회,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 등 해외 문학탐방 기행

2017.09.20 14:52:24

일제 강점기 때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펼쳤던 혈전의 땅, 연해주 지역 탐방

(서울=미래일보) 강소이 시인(한국현대시인협회 사무차장) = 여행은 새로운 생각의 산파다. 모색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라는 말만 들어도 사람들은 설렘과 흥분을 느낀다.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는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극동의 땅에 (사)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들 40명은 여행의 닻을 올렸다.

김용언 이사장과 정신재 부이사장, 이복자 부이사장, 지은경 부이사장, 박강남 상임이사, 조규수 사무국장, 강소이 사무차장의 인솔 하에 떠난 크루즈 여행. 한국현대시인협회에서 12년 만에 떠나는 해외 탐방이었다.

2017년 9월 10일 강원도 동해항을 출발한 이스턴 드림(EASTERN DREAM)호는 704km의 항해 후에 우리를 러시아 땅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22시간여 만인 다음날 오후에 내려주었다.

'러시아 연해주' 땅은 사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발해 땅이었으니, 우리의 것이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때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펼쳤던 혈전의 땅이기도 하다.

시인들의 여행은 문학과 관련된 문학유적지나 문학인을 탐방하는 여행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해주 지방은 압록강을 사이에 둔 한반도의 국경선을 사이에 둔 지정학적 혈투의 땅이었기에 그곳엔 문학의 흔적은 콩알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독립을 위해서 싸웠던 안중근 의사나 최재형 선생, 이상설 선생의 흔적. 그리고 조선 땅을 떠나 멀리 연해주로 삶의 터전을 옮겼던 고려인들의 애환을 피부로 느끼는 여행이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잠수함 박물관이었다. C-56잠수함은 제2차 세계대전 때 14대의 전함을 침몰시킨 잠수함이었다. 잠수함 안에는 수병들의 사진과 함장인 듯한 이들의 흉상, 잠수함 관련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잠수함 옆에는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새긴 기념 벽과 추모탑, 개선문이 세워져 있고 영원의 불꽃이 그치지 않고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말끔한 러시아 식당에서의 저녁 만찬-킹크랩과 매운탕이 준비되어 있었다. 테이블마다 킹크랩을 몇 접시씩 더 내어왔다. 푸짐한 저녁 식사 후, 숙소에서 여장을 풀고, 블라디보스토크 해변을 산책하며 러시아의 첫 밤을 사유했다. 동북의 해변가-젊음의 거리를 거닐면서 동쪽의 끝점에서 지구의 한 점을 찍는 여행을 생각하며 시인들의 시심은 익어갔다.

9월 12일, 우리 일행은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시베리아횡단 열차를 타고 우골나야역으로 이동했다. 50여 분 간 열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차창 밖으로 스쳐 흐르는 아무르 강을 내다보며 러시아의 낭만을 느끼고 싶었으나,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이곳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기차에 몸을 실었던 곳이라는 사실 앞에서 마음이 먹먹해져 온다. 킹크랩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기 위해 안주머니에 감추었을 권총-최재형 선생이 거사를 위해 마련해준 성능 좋은 권총을 품에 안고 달렸을 안 의사를 생각한다.

또한 1937년 8월 스탈린 소련 인민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71,781명의 고려인들이 124편의 열차에 태워져서 유라시아-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도 이곳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출발했다. 그 사실도 시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동물들을 싣는 화물열차 칸에 고려인들은 태워졌고, 열차 안에서 굶주림과 추위와 병균에 감염되어 죽어간 사람들도 많았다는 사실 앞에서도. 횡단열차는 우리나라 무궁화 열차 보다 시설이 열약했다. 기차역엔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가 전혀 없었고, 계단이 전부였다.

우골나야역에서 버스로 우수리스크로 이동하여, 29번 학교를 방문했다. 29번 학교 방문이 이번 여행의 백미라고 하겠다. 그 학교는 초·중·고교 과정을 한 학교에서 모두 가르친다.

한 학교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모든 과정을 교육하고 있다. 우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이 그 학교를 방문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 학교에서는 '한국어 교사'를 따로 두고, ‘한국어 수업’ 과정이 있어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러시아인들 중에 한국을 사랑하고 동경하며,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에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 학교를 방문하여, 격려의 마음을 전달하는 게 이번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 탐방의 여행 목적이라고 하겠다.

김나지아 교장, 주코프예브게니 브라디미로비치(러시아 교육 명예 교수)와 한국어 교사의 안내와 재학생들의 환대를 받으며 학교를 둘러보았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태극기와 러시아 국기를 손에 들고 계단에 일렬로 서서 우리를 맞아준 그들의 환영식이었다.

러시아 전통 빵을 손으로 뜯어 소금에 찍어 먹으라고 마련해준 그들의 뜨거운 환대가 뜨거운 가을 햇살 보다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수업 시간은 교장에게도 개방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먼 뱃길을 건너 우수리스크까지 찾아준 한국의 시인들에게 그들은 기꺼이 초등학교 수업을 참관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국어 교실 현장을 직접 참여하여 둘러보며 그들의 한국어 사랑을 확인하며 가슴 뭉클한 시간을 가졌다. 우리 시인들은 각자의 시집 두어 권과 초콜릿을 선물했고, 협회 차원에서 후원 성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전달식을 마치고 학생들이 마련한 공연-러시아 전통 율동과 노래 등-을 관람한 후 아쉬운 발길을 옮겨 다음 여행지로 이동했다. 우리들이 운동장을 걸어 교문을 나설 때까지 손을 흔들며 아쉬움을 보여준 29번 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그들의 한글 사랑과 한국에 대한 동경의 마음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수리스크의 햇살은 몹시 따가웠다. 9월의 가을볕은 미운 며느리에게 쪼이게 한다는데, 눈이 부실만큼 시린 볕 속에서 우리들은 최재형 선생의 집(순국 직전까지 거주했던 마지막 집)과 이상설 선생 유허비를 찾았다.

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1시간 30분 이상 소요되며, 차가 밀리면 저녁 식사 예약 시간에 맞추기 힘들다고 일정에서 빼겠다는 가이드의 계획에 시인들은 "저녁은 늦게 먹어도 좋고, 한 끼 굶어도 좋으니 봐야한다"고주장했다.

시인들의 고집에 밀려 가이드는 결국 최재형 선생의 고택과 이 상설 선생의 유허비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이 연해주에서 힘겹게 펼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꼭 보고 가야하는 거라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거사를 뒤에서 물질적으로 후원했던 최재형 선생. 고려인들의 정신적인 버팀목이었으며 실제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대륙의 영웅인 최재형 선생의 집은 러시아인에게 팔렸다가 우리 정부가 다시 사들여 기념관으로 꾸미기 위해 공사 중이라고 했다.

태극기를 펼쳐 들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그분이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의 거부가 되었던 이야기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야기를 생각하며,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을 알게 된 여정이었다.

그곳에서 15분 정도 이동하여 수이푼 강변에 세워진 이상설 선생 유허비를 둘러보며 우리는 묵념을 올렸다. 이준 열사,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다가 실패 후 조선 땅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곳에서 작고 한 설한(雪恨)의 독립 운동가였다.

조국 땅이 몹시 그리웠을 그분을 생각하며 무거운 맘을 안고 블라디보스토크 숙소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영상물을 보여준다. 영상을 보면서 흐느끼는 감수성 많은 시인들도 있었다. 저녁 식사 후,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며, 돌아갈 조국과 가족이 있다는 것에 감사의 마음을 올렸다.

9월 13일, 아침 일찍 우리 일행은 신한촌을 둘러보았다. 신한촌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버스로 10여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시내 중심부에 살던 고려인들을 한 곳에 모아 두려는 작은 이주 정책에 의해 이곳에 모여 살았던 고려인들. 그들은 극장도 짓고 꽤 번성했으나 유라시아로 강제 이주되는 고난을 겪어야 했고, 지금은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러시아 국적을 갖고 살아간다. 자신들의 뿌리가 한반도라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오지 못하는 고려인들, 까레이스키. 그들의 그리움과 애환이 어떨는지?

승선 후, 일몰이 지는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으로 사라져가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시인들은 아쉬움과 아픔을 연해주 하늘로 올려보냈다.

내 나라로 돌아가는 갑판 위에서, 까레이스키들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면서, 돌아오고 싶었으나 돌아오지 못한 이상설 선생-조선으로 돌아갈 기차와 선박마다 이상설 선생을 체포하려고 일제의 감시가 심했던 폭압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효창공원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묘역 옆에 안중근 의사의 허묘를 생각하면서.

그저 마음 아프기만 했던 귀국의 뱃길.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 의사의 묘역을 북한과 남한이 함께 서명해야만 중국 정부에서 유해 발굴 작업이 가능하다는 현실 앞에. 목숨 바쳐서 독립 운동을 했으나 분단된 조국을 내려다보고 있을 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생각하면서.

그래도, 한국을 동경하며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우수리스크 29번 학교 학생들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저녁노을 속에 시인들의 생각이 교차되기만 했다.

9월 14일 아침은 밝아왔고, 동쪽 하늘에서는 다시 해가 떠올랐다. 거친 바다 바람 속에서 우리 한국현대시인협회 시인들은 일출을 기다리면서, 우리 조국의 앞날에 희망의 해가 힘차게 솟아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환호성을 올렸다. 시어와 이미지로 표현하기 힘든 용솟음이 기운차게 바다를 뚫고 올라온다. 희망, 희망이다.

참고로 9월 13일 고려인문화센터 방문, 9월 14일 신한촌 방문 후, 러시아 정교회와 독수리 전망대를 둘러보았으나, 이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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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섭 기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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