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좋은 수필은 삶을 설명하지 않는다. 삶을 오래 바라보게 한다.
원준연 수필가의 다섯 번째 수필선집 <피아노 건반처럼>(교음사)은 우리 곁의 평범한 일상과 지나쳐 버리기 쉬운 기억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길어 올린 책이다. 농학자이자 교육자, 그리고 수필가로 살아온 저자의 깊은 사유는 사소한 경험을 삶의 철학으로 확장시키며 독자에게 잔잔한 울림을 전한다.
등단 20주년을 앞두고 지난 2024년 펴낸 이번 수필집에는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문학의 가장 큰 역할이라는 그의 문학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수필은 삶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는 문학이다. 거창한 사건보다 사소한 일상에서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고, 화려한 수사보다 담백한 언어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원준연 수필가의 이번 <피아노 건반처럼>은 바로 그런 수필 본연의 아름다움을 다시 일깨우는 책이다. 더욱이 이 작품집은 한국 수필문학의 원로인 고(故) 원종린 수필가의 문학적 유산을 자연스럽게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닌다.
삶을 연주하는 검은 건반과 흰 건반
<피아노 건반처럼>이라는 제목부터 많은 것을 암시한다.
피아노는 흑백의 건반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낸다. 인생 역시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만남과 이별이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하나의 삶이 완성된다.
원준연 수필가는 바로 그 삶의 건반 위에서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연주한다.
이번 수필집은 모두 4부 48편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1부 '재스민 여인'에서는 사람과 추억, 인간의 따뜻한 온기를 담아냈고, 2부 '어이할꼬!'에서는 삶의 아이러니와 가족애, 세월의 깊이를 풀어낸다.
3부 '택시는 리듬을 타고'에서는 노년의 삶과 시대 변화 속 인간의 모습을, 4부 '서커스와 수필'에서는 문화와 예술, 그리고 수필문학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농학박사이자 대학교수로 살아온 저자의 학문적 깊이는 작품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지만, 결코 독자를 압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랜 세월 삶을 관찰하며 길러낸 따뜻한 시선이 글마다 은은한 향기로 배어 있다.
편견을 넘어 인간을 바라보다
표제작 '피아노 건반처럼'은 이번 수필집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 공주에서 마주했던 미국 평화봉사단 외국인들과의 기억, 대학 시절 흑인 원어민 강사를 만나며 느꼈던 편견의 붕괴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검은 피부는 거칠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은 그의 손끝에서 무너진다.
직접 만져 본 흑인 교사의 피부는 오히려 아기처럼 부드러웠고, 그 경험은 사람을 색깔로 판단하는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 준다.
결국 피아노는 검은 건반이 있어야 아름다운 화음을 낸다. 인간 역시 다름이 모여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메시지를 작가는 조용히 들려준다.
설교하지 않으면서도 독자를 스스로 성찰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원준연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이다.
야생화 같은 문장, 생활 속에서 피어나는 문학
원준연 수필은 특별한 사건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칡 한 줄기, 택시 안의 풍경, 송편 한 접시, 간호장교의 미소, 산책길에서 만난 들꽃….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일상을 그는 오래 바라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과 사회를 읽어낸다.
출판사가 "야생화 같은 은은한 향기를 지닌 수필"이라고 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문장은 과장되지 않는다. 소박하지만 오래 남는다. 담백하지만 깊다. 읽고 나면 마음 한편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이유다.
부친 원종린, 그리고 아들 원준연… 두 세대가 이어온 한국 수필문학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바로 한국 수필문학의 원로 고(故) 원종린(元鍾麟) 선생이다.
1923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원종린 선생은 1947년부터 수필을 쓰기 시작해 1965년 <현대문학>으로 정식 등단했다.
공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를 지내며 교육자로서의 삶과 문학인의 길을 함께 걸었고, 평생을 호서 지역 수필문학 발전에 헌신했다.
그의 수필은 삶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 그리고 맑고 단아한 문체로 한국 현대수필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늘날에도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원종린수필문학상'은 한국 수필문학을 대표하는 권위 있는 문학상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원준연 수필가는 그 정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배운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문체를 답습하지 않았다. 삶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닮았지만 표현은 자신의 언어를 선택했다.
아버지가 인간의 품격을 이야기했다면, 아들은 생활 속에서 피어나는 소소한 감동을 노래한다. 부친이 한국 수필문학의 큰 줄기를 세웠다면, 아들은 그 줄기 위에 새로운 잎을 틔우고 있는 셈이다.
문학은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문학을 대하는 태도와 삶의 자세는 세대를 넘어 전해질 수 있다. 원종린에서 원준연으로 이어지는 수필의 계보는 바로 그런 아름다운 문학적 계승의 한 사례라 할 만하다.

수필은 결국 사람을 향하는 문학
원준연 수필을 읽고 나면 화려한 기교보다 사람 냄새가 먼저 남는다. 인간을 향한 신뢰. 삶에 대한 애정. 그리고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바라보려는 마음. 그것이 그의 수필을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
<피아노 건반처럼>은 거대한 담론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 삶 전체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래서 독자는 책장을 덮은 뒤에도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원준연 수필가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충남대학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돗토리대학교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중부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뒤 정년퇴임했으며, 교육자와 연구자의 길을 걸어온 경험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왔다.
2005년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감사, 대전문인협회 회장,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등을 맡으며 문단 발전에도 힘써 왔다.
제24회 수필문학상과 제28회 대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미울 정도로 곱게>, <이순의 경지는 어찌하여> 등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다섯 번째 수필선집 <피아노 건반처럼>은 오랜 교육자이자 문인의 삶에서 길어 올린 성찰과 따뜻한 인간애가 가장 원숙하게 드러난 작품집이라 할 만하다.
발문을 쓴 오경자 수필가는 원준연의 작품 세계를 두고 "세상만사가 모두 수필의 글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교과서처럼 보여 주는 수필"이라고 평한다.
실제로 이 책은 거창한 사건보다 생활 속에서 만나는 작은 풍경과 사소한 체험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성찰한다.
학자의 해박한 식견과 생활인의 따뜻한 시선, 문학인의 섬세한 감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읽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수필은 삶의 가장 느린 걸음으로 독자의 곁에 다가오는 문학이다.
원준연의 <피아노 건반처럼>은 흑백의 건반이 하나의 음악을 완성하듯, 기쁨과 슬픔, 추억과 성찰이 어우러져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 선율의 깊은 울림 뒤에는 한국 수필문학의 큰 나무였던 고(故) 원종린 선생이 평생 지켜온 문학정신이 조용히 흐르고 있다.
한 세대가 심은 문학의 씨앗이 또 다른 세대의 글 속에서 꽃을 피우는 일.
그것은 한 권의 수필집을 넘어, 한국 수필문학이 이어가는 아름다운 계승의 역사이기도 하다.
<피아노 건반처럼>은 그 계승의 의미를 담담하게 증명하는 한 권의 책이며, 삶의 음표를 잃지 않으려는 모든 독자에게 오래도록 따뜻한 여운을 남겨줄 것이다.
피아노에는 검은 건반도 있고 흰 건반도 있다. 서로 다른 색이지만 어느 하나가 빠지면 온전한 음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도 그렇다. 다름은 갈등의 이유가 아니라 아름다운 화음을 만드는 조건이다.
원준연 수필선집 <피아노 건반처럼>은 화려한 문장보다 진실한 경험이 더 깊은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하는 책이다.
한 편 한 편의 수필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건반을 외면하고 있는가."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이 수필집은 오래 곁에 두고 다시 펼쳐볼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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