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46년이 걸렸다. 박정희 정권 말기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던 고(故) 김남주 시인이 2026년 9월 2일 서울중앙지법의 재심에서 마침내 무죄를 선고받았다. 1979년 체포와 1980년 유죄 판결 이후 46년 만이다.
재판부는 당시 김 시인이 불법 체포·구금된 상태에서 폭행과 협박 등 가혹행위를 받으며 조사를 받았다고 판단했다. 그 과정에서 확보된 증거 대부분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법정에서의 자백 역시 불법 수사의 심리적 영향에서 자유롭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객관적 증거 없이 자백만으로 유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재심 무죄 판결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 판결을 단순히 한 시인의 명예회복으로만 바라보기에는 그 의미가 크다.
김남주의 '무죄'는 한 개인에게 뒤늦게 돌려준 법적 명예이면서, 동시에 한 시대가 문학과 양심을 어떻게 억압했는지를 다시 묻는 역사적 판결이기 때문이다.
46년 만에 돌아온 두 글자, '무죄'
김남주 시인은 1978년 남민전 준비위원회에 가입해 반유신 활동을 벌였다는 이유 등으로 1979년 10월 체포됐다.
남민전은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지하조직으로, 당시 정부는 이를 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 규정했다. 김남주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대거 검거됐고, 김남주 시인은 1980년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후 과거사 조사에서 남민전 사건을 둘러싼 국가권력의 대응과 수사 과정의 문제점이 확인됐다.
2006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김남주 시인을 비롯한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고, 경찰청 과거사위원회 역시 남민전 사건이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정부가 위기를 조장하고 언론 보도의 오보를 양산한 잘못이 있었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렸다.
유족은 2024년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같은 해 10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2026년 9월 2일, 마침내 '무죄'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김남주는 이미 32년 전 세상을 떠났다.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뒤 5년여 만인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9년 2개월여의 옥살이를 포함해 그의 인생에서 빼앗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판결은 기쁨과 함께 깊은 슬픔을 남긴다.
살아 있을 때 돌려주지 못한 무죄. 청춘을 빼앗은 뒤 너무 늦게 도착한 명예회복.
해남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시인의 씨앗'김남주 시인은 194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광주일고를 다니다 입시 중심 교육에 반발해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거쳐 1969년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청춘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3선 개헌 반대운동과 교련 반대운동 등에 참여했고, 유신헌법이 선포된 1972년에는 반유신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했다. 이듬해에는 '고발'로 제호를 바꿔 전국에 배포하려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옥고를 치렀고 대학에서도 제적됐다.
그에게 문학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방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농민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중의 삶을 가까이에서 경험했고, 1974년 계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이때부터 김남주 시인의 시는 '시를 쓰는 사람'과 '시를 살아내는 사람' 사이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한다.
"시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김남주의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는 시인과 시대의 관계다. 그에게 시인은 아름다운 언어만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폭압과 불의가 존재하는 시대에 침묵하지 않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의 목소리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 그리고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김남주의 시가 독재와 싸우는 무기였으며, 현실의 부정과 불의에 눈감으려는 소시민적 태도에 날카로운 채찍이 됐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유난히 강한 동사들이 등장한다.
싸운다.
견딘다.
깨운다.
나아간다.
기다린다.
해방한다.
김남주의 시는 관념으로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그의 시를 당시 독자들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킨 이유다.
감옥은 그의 시를 가두지 못했다
김남주 문학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옥중 창작이다. 그는 9년이 넘는 수감생활 동안에도 시를 멈추지 않았다.
전남대학교 자료에 따르면 김남주는 생전에 470여 편의 시를 발표했고, 그 가운데 약 300편을 옥중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옥중 시인’으로 불렸다.
감옥은 육체를 가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과 언어까지 가둘 수는 없었다.
그는 감옥 안에서 첫 시집 <진혼가>를 비롯해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등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특히 옥중에서 쓴 시들은 김남주 문학의 핵심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억압받는 현실에 대한 분노,
민중에 대한 연대,
자유와 해방에 대한 열망,
분단된 조국에 대한 고민,
그리고 인간다운 세상을 향한 꿈.
그의 시에서 '칼'과 '피'는 단순한 폭력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부당한 현실을 향해 자신을 던진 시인의 결연한 정신을 상징한다.
<진혼가>에서 <조국은 하나다>까지
김남주의 작품세계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는 흔히 '저항시인', '민중시인', '혁명시인'으로 불리지만, 그의 시를 정치적 구호로만 읽는다면 오히려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그의 시에는 정치와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사랑과 인간, 자연과 노동, 고향과 가족, 분단과 통일,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가 함께 흐른다.
주요 시집으로는 <진혼가>,<『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 <이 좋은 세상에> 등이 있으며, 산문집과 번역서도 남겼다.
특히 <조국은 하나다>라는 제목 자체가 그의 문학적 지향을 압축한다. 그에게 분단은 추상적인 정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가족과 가족을 갈라놓으며, 민족의 기억을 둘로 쪼개는 현실이었다. 따라서 통일은 정치적 슬로건이기 이전에 인간의 삶을 온전하게 회복하는 문제였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노래한 시인
방현석 작가(중앙대학교 교수)가 최근 SNS에 남긴 김남주에 대한 회고는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다.
방 작가는 대학 시절 김남주의 긴 시 '나 자신을 노래한다'를 외우고 다녔다고 회고하며, 김남주가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통해 자유를 위한 투쟁의 의미를 노래했다고 기억했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네주었다면, 김남주는 억압받는 민중에게 '자유의 불'을 건네고자 했던 시인이었다.
그가 감옥에서 쓴 시는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니었다. 언어로 만든 불씨였다. 한 편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깨우고, 한 사람의 각성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그 작은 불씨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불길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장건섭 시인이 기억하는 '군인의 책가방 속 김남주'
김남주 시인의 이번 재심 무죄 소식은 오늘을 사는 독자들에게만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당시의 청춘을 지나온 이들에게는 자신의 젊은 날을 다시 불러내는 사건이기도 하다.
특히 장건섭 시인(본지 편집국장)에게 김남주는 한때 군복을 입은 청춘의 책가방 속에 들어 있던 시인이었다.
김남주 시인이 구속되던 해인 1979년 3월,유신 정권 말기에 군에 입대했던 본 기자는 혹독한 군사훈련 과정에서도 틈틈이 그의 시집을 읽었다.
훈련과 규율, 군화 소리와 구령이 이어지는 하루 속에서 김남주의 시를 읽는 일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한쪽에는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군인의 현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자유와 민주, 인간의 존엄을 향해 거침없이 외치는 시인의 언어가 있었다.
그때 젊은 병사였던 필자는 감옥에 갇힌 김남주 시인을 안타까워했고, 그의 구속을 바라보며 시대의 부당함에 분노했다. 그러나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한 사람의 청춘에서 9년이라는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한 시대의 폭력이 한 인간의 몸과 마음에 얼마나 오래 흔적을 남기는지를. 46년 뒤 법원이 내린 무죄 판결은 그 기억까지 다시 불러냈다.
1991년, 신동엽창작기금이 이어준 두 사람
김남주 시인은 1991년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다. 전남대학교와 관련 자료에 따르면 김남주는 신동엽창작기금을 비롯해 단재문학상, 윤상원상, 민족예술상, 파주북어워드 특별상 등을 받았다.
방현석 작가가 회고한 것처럼, 당시 젊은 문인들에게 김남주는 단순한 선배 문인이 아니었다.
그는 문학과 삶을 분리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섰고, 작품보다 삶이 먼저 증명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문학작품을 감상하는 행위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가.'
'시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독자 자신에게 돌려주는 일이었다.
너무 늦은 무죄, 그러나 늦지 않은 문학
김남주 시인은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7세였다. 그의 삶은 짧았지만 문학은 그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았다.
2010년 전남대학교는 그에게 입학 41년 만에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2019년에는 김남주기념홀이 조성돼 그의 문학과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이제 2026년. 무죄라는 두 글자가 그의 이름 앞에 놓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판결은 김남주에게 새로운 명예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의 문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증언해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번 판결이 우리에게 돌려준 것은 김남주의 이름이 아니라 역사의 한 조각이다. 국가가 한 사람에게 씌웠던 죄의 굴레를 벗겨내고, 그 시대의 기록을 다시 쓰는 일이다.
김남주의 시는 아직 현재형이다
오늘 김남주의 시를 다시 읽는 이유는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와 오늘의 시대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자유와 인간의 존엄, 민주주의와 평화라는 질문은 여전히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김남주는 시를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부당함 앞에서 침묵할 것인가. 그리고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것인가.
그의 시가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질문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의 양심을 묻는 질문은 늙지 않는다.
46년 만에 피어난 '무죄'라는 꽃
김남주 시인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앞에는 철문이 있었다. 그러나 철문 안에서도 시는 자랐다. 종이가 없으면 다른 것에 쓰고, 펜이 없으면 마음에 새기며 그는 시대를 기록했다.
그렇게 태어난 시들이 감옥의 담장을 넘어 사람들의 가슴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46년이 흘렀다. 시인은 떠났지만 그의 시는 남았다.
판결문은 이제야 말했다. "무죄."
너무 늦게 도착한 두 글자다. 하지만 그 두 글자를 바라보며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한 사람의 청춘을 빼앗은 시대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 시대를 견디며 끝내 시를 놓지 않았던 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김남주. 그는 이제 법정의 피고석에서 완전히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시인의 자리로 돌아왔다. 어쩌면 그것이 46년 만에 우리 사회가 김남주에게 돌려드려야 할 가장 중요한 자리인지도 모른다.
그의 무죄는 너무 늦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늦지 않았다. 오늘도 누군가 김남주의 시집을 펼치는 순간, 그가 건네준 작은 불씨 하나가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김남주 시인에게 바치는 늦은 인사.
"선배님,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남긴 시와 불씨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야, 그 불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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