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한글날 제정 100주년과 훈민정음 반포 580돌을 맞아 한글 자음 이름 가운데 '기역·디귿·시옷'을 '기윽·디읃·시읏'으로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복수 표준어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과 이대로·한재준 씨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기역을 기윽으로 바꾸는 세계운동본부1 0월 9일 한글날 제정 100주년 기념 성명서를 통해 "한글 자음자의 이름 가운데 오직 세 글자인 ‘기역·디귿·시옷’만 다른 이름들과 어긋나 있다"며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에 ‘기윽·디읃·시읏’을 기존 명칭과 함께 복수 표준어로 지정할 것을 촉구했다.
세계운동본부는 공동대표 김슬옹·이대로 명의의 성명에서 "올해는 한글날이 제정된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라며 "한글의 과학성과 체계적 일관성을 글자의 이름에서도 바로 세워야 할 때"라고 밝혔다.
"전통이 아니라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생긴 예외"
성명서는 '기역·디귿·시옷'이라는 명칭이 오랜 전통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자 표기의 한계 속에서 생겨난 예외라는 점을 강조했다.
세계운동본부는 "1527년 무렵 최세진이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에서 자음자의 이름을 한자로만 적는 과정에서 '윽·읃 옷'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어 각각 다른 한자를 빌려 적으면서 오늘날의 명칭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글로 무엇이든 적을 수 있는 오늘날까지 당시 한자로만 표기해야 했던 시대적 사정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과연 전통을 지키는 일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성명서는 특히 "499년 동안 이어져 온 예외를 이제는 바로잡아야 한다"며 "이는 단순히 글자 이름 몇 개를 바꾸자는 문제가 아니라 한글 체계의 일관성을 회복하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한글의 과학성, 자모 이름에서도 한결같아야"
세계운동본부는 한글 자음 이름의 체계적 원리를 강조하며 '기윽·디읃·시읏'이라는 명칭이 기존 자모 이름의 구조와 더욱 일관된다고 설명했다.
'니은·리을·미음·비읍' 등 다른 자음 이름과 비교할 때 '기역·디귿·시옷'만 별도의 방식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성명서는 "한글은 창제 원리가 한결같기에 과학적"이라며 "그 한결같음을 정작 글자의 이름에서 깨뜨리고 있다면 한글의 과학성을 온전히 말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훈민정음 해례에 담긴 창제 원리와 자음 체계의 일관성을 언급하며 “한글의 과학성은 글자의 모양뿐 아니라 그 체계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방식에서도 존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의 창제 정신은 누구나 쉽게 배우는 글자"
성명서는 이번 명칭 개선 요구가 한글 교육의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주장했다.
세종대왕이 누구나 쉽게 익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오늘날 한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이와 외국인 학습자들이 자음 이름을 익히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예외를 암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셰계운동본부는 "한글을 배우는 첫 단계에서 '왜 이 세 글자만 다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며 "전 세계적으로 한국어 학습 열풍이 확산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예외는 학습자들에게 불필요한 암기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쉽게 배우고 날마다 편하게 쓰도록 하려 했던 세종의 창제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시경의 주장과 남북 자모 명칭 통일 문제
성명서는 '기윽·디읃·시읏'이라는 명칭 사용이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 한글학자 주시경의 문제의식과도 연결돼 있다고 밝혔다.
또 북한에서는 이미 '기윽·디읃·시읏'이라는 방식으로 자모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자모 명칭의 문제를 남북 언어 통합과 연결해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셰계운동본부는 "남북의 말과 글을 잇는 일에서 자모의 이름을 함께 사용하는 것보다 더 기초적인 언어 통합 과제는 많지 않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미래 통일 시대의 국어를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복수 표준어 지정이 가장 현실적인 해법"
셰계운동본부는 기존의 '기역·디귿·시옷'을 당장 폐기하는 방식보다는 ‘기윽·디읃·시읏’을 함께 인정하는 복수 표준어 방식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제시했다.
성명서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과거 '자장면·짜장면', '태껸·택견', '품세·품새' 등을 함께 인정한 사례를 언급하며 국민의 언어생활과 사용 현실을 반영한 복수 표준어 정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세계운동본부는 "출판물과 인쇄물의 혼란을 우려한다면 오히려 복수 표준어 지정이 가장 온당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며 "기존 명칭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명칭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문체부·국립국어원에 5대 요구
세계운동본부는 이번 성명서를 통해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 등에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우선 '기윽·디읃·시읏'을 '기역·디귿·시옷'과 함께 복수 표준어로 지정할 것을 요구했다.
또 이 문제에 대한 학술 세미나와 공청회를 열어 전문가와 국민이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 국어심의회에 해당 안건을 정식으로 상정할 것을 촉구했다.
아울러 자모 명칭이 변경되거나 복수 표준어로 인정될 경우 교과서와 사전, 공공 언어 자료 등에 함께 반영할 수 있도록 관계 기관과 협의할 것도 요구했다.
남북 언어 교류 관련 기관에는 자모 명칭 통일 문제를 겨레말 통합의 우선 과제로 삼아줄 것을 요청했다. 국민운동본부는 특히 "'기윽'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틀렸다는 지적을 받는 일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며 "그 첫 매듭이 복수 표준어 지정"이라고 강조했다.
"499년이면 충분히 기다렸다"
성명서의 마지막은 강한 실천 의지로 이어진다.
세계운동본부는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아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강연과 저술, 서명과 청원, 교육과 토론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한글은 세종이 백성에게 준 선물이며, 그 선물을 온전한 모습으로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성명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499년이면 충분히 기다렸습니다. 이제 바로잡읍시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아 제기된 이번 자모 명칭 개선 운동이 국어학계와 교육계, 그리고 일반 국민 사이에서 어떤 논의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특히 '기역·디귿·시옷'이라는 오랜 언어 관습과 ‘기윽·디읃·시읏’이라는 체계적 명명 방식 사이의 논의는 단순한 표기 변경을 넘어 한글의 역사성과 과학성, 언어생활의 현실성과 교육적 효율성을 함께 검토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성명 참여 단체
이번 성명에는 내방가사문학회, 대한바른글쓰기협회, 사단법인 국어문화운동본부, 사단법인 한말글, 세종국어문화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세종학교육원, 세종훈민정음배움터, 연세대한글물결, 연세대한글물결동문회, 유엔한반도평화번영재단(유엔 피스코), 월인 훈민정음연구소, 전국국어운동고등학생연합회 한글나무 동문회, 전국국어운동대학생회동문회, 한국국어능력평가협회,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한글문화연대, 한글새움, 한글예술원 등이 참여했다.
한글을 사랑한다는 것은
한글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한글날 하루를 기념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그 글자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기억하고,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다음 세대가 더 쉽고 편하게 배울 수 있도록 고민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기역'이냐 '기윽'이냐의 논쟁은 어쩌면 작은 글자 이름 하나의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작은 이름 속에는 한글의 역사와 원리, 교육과 문화, 그리고 미래의 언어생활이 함께 들어 있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 499년 동안 이어진 예외를 바로잡자는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 새로운 한글 사랑의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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