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 장건섭 기자 = 한류와 인공지능(AI)이 언어와 문화의 국경을 빠르게 허물고 있는 가운데, 한국어와 한글문학 역시 한국이라는 지리적·민족적 경계를 넘어 세계인이 함께 배우고 사용하고 창작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제12회 세계한글작가대회가 9월 16일 세종대학교 대양AI센터에서 기조강연과 주제발표를 이어가며 한글문학의 세계화와 미래 방향을 모색했다.
이날 기조강연에는 김홍신 소설가, 김주혜 소설가, 조지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교수가 연사로 나섰다. 이 가운데 조지은 교수는 'AI시대, 한글문학이 나아갈 길'을 주제로 강연하며 한글문학의 미래를 '글로벌 한국어(Global Korean)'와 '글로벌 한글문학(Global Hangeul Literature)'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했다.
조 교수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한국어학을 연구하며 한국어와 다언어주의, 한류와 언어, 번역, 언어교육, AI와 언어의 관계 등을 연구하고 있다.
옥스퍼드대학교는 2026년 5월 대학 최초의 전담 한국학센터인 Oxford Centre for Korean Studies(OCKS) 설립 계획을 공식 발표했으며, 이 센터는 한국의 언어·문화·역사·미디어와 한류의 세계적 영향 등을 아우르는 학제 간 연구 거점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한류가 바꾼 한국어의 경계
조 교수는 먼저 한류의 확산이 한국어와 한국문학의 경계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주목했다.
과거 한국문학은 대체로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문학'이라는 범주에서 이해돼 왔다. 그러나 K-pop과 영화, 드라마, 웹툰, 애니메이션, 게임 등 한국 콘텐츠가 세계인의 일상으로 들어가면서 한국어와 한국의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
이제 한국의 이야기는 한국인만의 것이 아니다.
한국계 작가가 영어로 쓴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돼 한국 독자와 만나고, 한국의 신화와 설화가 외국 작가와 예술가의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조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통해 한국문학을 작가의 국적이나 창작 언어 하나만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이야기가 다른 언어로 창작되고,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고, 세계의 독자들이 자신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 자체가 새로운 한국문학의 지형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6위 학습 언어로 올라선 한국어
조 교수가 제시한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는 '글로벌 한국어'였다.
한국어는 더 이상 한반도와 한국인이라는 지리적·민족적 경계에만 머무르는 언어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K-pop을 한국어로 따라 부르고, 드라마 속 표현을 익히며 한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듀오링고가 발표한 2025년 언어 보고서에서는 한국어가 전 세계에서 학습되는 언어 가운데 6위에 올랐다. 일본어가 4위, 독일어가 5위에 이어 한국어가 6위를 차지했으며, 한국어는 이탈리아어를 앞질렀다. 듀오링고는 2025년 한국어가 여러 국가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학습 언어 가운데 하나였다고 밝혔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한류 팬덤이 자리하고 있다.
K-pop과 드라마를 통해 한국어를 접한 세계의 팬들은 단순히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품 속 단어와 표현을 찾아보고, 서로 번역하고, 의미를 설명하며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배우고 사용한다.
조 교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류 팬덤을 한국어의 새로운 주체로 바라봤다.
한국문화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한국어를 배우고 사용하며 확산시키는 적극적인 언어 사용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빠·언니·김밥'…한국어가 세계 언어 속으로
한국어가 세계 언어와 만나는 구체적인 현상도 소개됐다.
'oppa(오빠)', 'unni(언니)', 'noona(누나)', 'hyung(형)', 'maknae(막내)'와 같은 표현을 비롯해 'kimchi(김치)', ]kimbap(김밥)', 'bibimbap(비빔밥)', 'tteokbokki(떡볶기)', 'mukbang(먹방)', 'chimaek(치맥)' 등 한국의 생활문화와 연결된 단어들이 영어권에서 그대로 사용되는 사례다.
이는 단순히 외국어에 한국어 단어 몇 개가 추가되는 현상이 아니다.
언어가 이동한다는 것은 그 언어에 담긴 문화와 관계 방식, 음식과 생활세계까지 함께 이동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특히 이러한 변화의 주체가 한국인만이 아니라 세계의 한류 팬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세계의 사람들이 한국어 표현을 배우고 실제 소통 속에서 사용하면서 한국어가 다른 언어의 일부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번역의 장벽'이 호기심을 만든다
조 교수는 한류와 언어의 관계를 설명하며 ‘낯섦’의 역설에도 주목했다.
언어의 장벽은 세계화를 가로막는 요소이지만, 한류에서는 오히려 번역되지 않은 한국어가 한국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드라마와 영화, K-pop 속에서 낯선 한국어 표현을 만난 세계의 팬들은 그 뜻을 찾아보고 서로 설명한다.
콘텐츠를 즐기는 일이 자연스럽게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완벽하게 번역된 세계에서는 사라질 수도 있는 ‘낯섦’이 오히려 새로운 관심과 학습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AI, 번역가를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문학의 문턱을 낮추는 기술
조 교수의 강연에서 또 하나의 핵심 화두는 AI였다.
AI는 언어와 번역의 장벽을 낮출 수 있는 강력한 기술이지만, 문학에서 인간 번역가의 역할까지 단순히 대체하는 방향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설명이 이어졌다.
문학에는 사전적 의미만 존재하지 않는다.
문장의 리듬과 문체, 함축과 여백, 문화적 맥락, 작가 고유의 목소리가 함께 존재한다.
따라서 AI가 초벌 번역과 언어적 변환을 빠르게 수행하고, 인간 번역가가 작품의 문학성과 문화적 맥락을 살피는 협업 구조가 중요한 미래의 한 방향으로 제시됐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문학의 세계화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좋은 작품이 번역과 편집, 해외 출판이라는 긴 과정을 거쳐야 세계 독자에게 도달했던 기존 구조에서 AI가 일정 부분의 언어적 장벽을 낮춰준다면 더 많은 작품이 세계 독자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AI의 가능성을 인간의 창작과 번역을 대신하는 데서 찾기보다 더 많은 작품과 독자가 만날 수 있도록 문학의 문턱을 낮추는 데서 찾았다.
한글, 세계의 소리를 담는 문자로
한글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제시됐다.
한글은 한국어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이지만 자음과 모음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소리를 표기하는 특성을 지닌다.
조 교수는 앞으로 필요한 경우 자모 체계를 확장하고 보완한다면 한글이 다양한 언어의 소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기여할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한글문학’의 개념 자체를 넓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글문학을 단순히 ‘한국어로 쓰인 문학’에 한정하지 않고, 세계의 다양한 언어와 목소리를 한글이라는 문자로 담아내는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까지 열어놓는 것이다.
"한국의 이야기를 세계인이 다시 이야기하게 해야"
조 교수의 강연이 궁극적으로 향한 곳은 ‘한국의 이야기’였다.
한국에는 수많은 신화와 설화, 민담과 구비문학이 존재한다. 그러나 세계문학의 무대에서 널리 공유되고 재창작되는 한국의 이야기는 아직 제한적이다.
조 교수는 세계적인 고전이 특정 민족의 소유물에 머물지 않고 다른 시대와 언어, 문화권의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끊임없이 번역되고 재해석되면서 살아남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스의 <오디세이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오늘날 세계의 작가와 영화감독, 예술가들은 고대의 이야기를 자신의 시대와 방식으로 다시 해석하고 있다.
한국의 신화와 설화, 민담과 구비문학 역시 한국인만 보존하고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열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 조 교수의 제언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이야기가 다른 언어와 문화권을 거쳐 문학과 영화, 애니메이션, 웹툰, 게임 등으로 다시 태어날 때 한국의 이야기는 비로소 세계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살아 있는 서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한국어'에서 '글로벌 한글문학'으로
조 교수의 강연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한류가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단계를 넘어 세계인이 한국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면, 한글문학 역시 세계인이 함께 읽고 쓰고 다시 창작하는 단계로 확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단순한 '수출'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는 접근이다.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독자가 한국의 이야기를 자신의 언어와 문화, 상상력으로 다시 이야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조 교수는 그 가능성을 '글로벌 한글문학(Global Hangeul Literature)'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했다.
옥스퍼드대학교가 2026년 대학 최초의 전담 한국학센터인 OCKS 설립을 추진하는 것도 이러한 국제적 관심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옥스퍼드는 이 센터를 통해 한국의 언어·문화·역사·사회·미디어와 한류의 세계적 영향 등을 아우르는 연구와 교육, 번역 및 문화 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이다.
우리의 '오디세이'를 세계와 함께
조지은 교수의 기조강연은 한글과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을 '한국에서 세계로' 확장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세계가 한국의 이야기를 읽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사람들이 한국의 이야기를 자신의 언어와 문화, 상상력으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류가 한국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열었다면, AI는 언어와 번역의 문턱을 낮추는 새로운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두 흐름이 만나는 지점에서 ‘글로벌 한글문학’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한글은 한국어를 기록하는 문자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배우고 사용하는 문자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문학 역시 국경과 언어의 벽을 넘어 새로운 독자와 창작자를 만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한국의 이야기를 세계에 들려주는 데서 멈추지 않는 일이다.
우리의 신화와 설화, 민담과 구비문학이라는 오래된 이야기 보따리를 세계에 열어놓고, 세계의 작가와 독자들이 그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언어와 상상력으로 다시 풀어낼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고대의 <오디세이아>가 한 민족의 이야기를 넘어 세계문학의 이야기로 살아 있듯, 한국의 이야기 역시 세계인의 상상력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다.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것'을 넘어 '세계인이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하게 하는 것'.
제12회 세계한글작가대회에서 조지은 교수가 던진 화두는 바로 그 지점에 닿아 있다.
AI시대의 한글문학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 답은 아직 열려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글문학의 무대가 더 이상 한국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 보따리를 세계와 함께 열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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