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아흔을 넘긴 시인의 시선은 오히려 더 푸르다. 삶의 끝자락을 노래하기보다 다시 시작되는 생명의 시간을 바라본다.
김보환 시조시인의 네 번째 시조선집 <나목에도 꽃이 피네>(명성서림)는 한 사람의 생애가 빚어낸 연륜과 우리 전통 정형시의 품격이 만나 완성된 결실이다. 자연과 인간, 조국과 가족, 그리고 세월을 향한 따뜻한 성찰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잔잔한 위로를 건넨다.
1935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난 김보환 시인은 청송의병장 김진구 선생의 증손으로 나라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육군 공병학교 교관을 거쳐 서울시 영등포정수사업소장과 동대문구청 건설교통국장(부이사관)을 역임하며 평생 공직자로 봉사했고, 대통령 표창과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인생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에 들어선 그는 2013년 <한국문학정신> 신인문학상을 시작으로 시와 시조를 넘나들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 왔다.
제2회 한하운문학상 시조 부문 최우수상, 세계문학상 시조 부문 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현대시조 번역선집에도 작품이 수록되어 한국 시조의 세계화에도 힘을 보탰다.
무엇보다 그의 문학은 늦게 시작했지만 결코 늦지 않았다. 시인이 책머리에서 남긴 "늦으면 어때, 망백이 출발인데!"라는 한마디는 이번 시조선집 전체를 관통하는 문학적 선언이기도 하다.
이번 시조선집은 모두 176쪽, 6부로 구성되어 120여 편의 작품을 담았다.
제1부 '가을 나그네'
첫 번째 장은 인생의 풍경과 계절의 변화를 함께 노래한다. '물의 요술', '가을 나그네', '은행잎 거리', '약손', '무릎학교', '거짓말의 진리' 등은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통해 삶의 지혜를 길어 올린다.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을 성찰하게 하는 스승으로 자리하며, 담백한 언어 속에서 깊은 철학을 드러낸다.
제2부 '노송 뿌리'
두 번째 장은 흔들리지 않는 삶의 중심을 이야기한다. '노송 뿌리', '산과 물', '생의 애착', '포장마차', '성묘', '조약돌' 등에서는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인간의 의지와 뿌리 깊은 삶의 자세가 묵직하게 펼쳐진다. 노송의 뿌리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을 지탱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제3부 '황혼의 선물'
이번 시조집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장이다. '황혼의 선물', '나목에도 꽃이 피네', '영혼의 여행', '첫눈', '자화상', '6·25' 등에서는 노년의 성찰과 역사의 기억, 그리고 생명의 희망이 교차한다. 황혼은 끝이 아니라 더욱 깊어지는 빛이며, 삶의 마지막 계절에서도 희망은 꽃처럼 피어난다는 메시지가 작품마다 스며 있다.
제4부 '고향의 향기'
고향과 어머니,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짙게 배어 있는 장이다. '어머니의 부뚜막', '우물', '고향의 향기', '홍시', '까치밥', '상사화', '물 같이 살고파' 등에서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부모의 사랑, 고향의 따뜻한 정서가 담담하게 되살아난다. 한 편 한 편이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는 듯한 아련한 감동을 전한다.
제5부 '바람과 세월'
삶을 관조하는 시인의 철학이 가장 깊게 드러난다. '바람과 세월', '산수유', '복수초', '매화', '진달래', '우리 할매 자장가', '우크라 전쟁' 등에서는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역사, 사랑과 평화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개인의 삶을 넘어 시대를 품으려는 시인의 시선이 돋보인다.
제6부 '청령포의 관음송'
마지막 장은 역사와 민족, 그리고 인간의 품격을 노래하는 정신의 공간이다. '경복궁', '호국', '청령포의 관음송', '백마고지 백골이', '시련을 넘어서', '대나무' 등은 우리 역사와 나라 사랑, 선조들의 희생을 기리는 작품들이다. 개인의 삶을 넘어 공동체의 가치와 역사적 책임을 일깨우며 시조집을 힘 있게 마무리한다.
◇ 표제작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
나목에도 꽃이 피네
- 김보환 시조시인
혼탁한 세상사를 잠시라도 잊으려고
저무는 인생길에 지리산을 찾았더니
설능(雪綾)의 장쾌한 전경 새 천지가 펼쳐졌네
눈이 오면 눈꽃 피고 바람 불면 상고대가
차가운 건 내 맘이지 대지는 아니구나
나목도 꽃이 피는데 일어서라 망구야
이번 시조선집의 표제작 '나목에도 꽃이 피네'는 김보환 시인의 문학 세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시인은 혼탁한 세상을 잠시 내려놓고 지리산 설원을 찾는다. 눈으로 뒤덮인 산은 황량한 겨울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또 하나의 세상으로 다가온다. 눈꽃과 상고대는 혹독한 추위가 빚어낸 겨울의 꽃이며, 자연은 추위 속에서도 쉼 없이 생명의 질서를 이어 간다.
특히 "차가운 건 내 맘이지 대지는 아니구나"라는 구절은 작품의 중심축이다. 차가운 것은 계절도 자연도 아니라 삶에 지친 인간의 마음이라는 깨달음이다. 자연은 언제나 생명을 품고 있으며, 나목조차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시인은 삶을 향한 희망을 발견한다.
종장의 "나목도 꽃이 피는데 일어서라 망구야"는 자신을 향한 다짐이자 모든 독자에게 건네는 격려이다. 망구(望九)를 지나 백수를 바라보는 노시인의 목소리에는 체념 대신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연륜이 쌓일수록 삶은 저물어 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은 꽃을 피워 가는 과정이라는 철학이 이 한 편의 시조에 응축되어 있다.
<나목에도 꽃이 피네>는 결국 겨울나무를 노래하는 시집이 아니다. 긴 세월을 견디고도 끝내 꽃을 피워 내는 인간의 생명력과 희망을 노래하는 시조집이다. 김보환 시인의 담담한 언어는 독자들에게 조용히 말한다. "자연은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또한 끝내 다시 일어서야 한다."

사람을 품은 시조, 시대를 품은 언어
김보환 시인의 시조는 화려한 수사보다 절제된 언어를 선택한다. 오랜 공직 생활에서 길러진 책임감과 인생의 깊은 연륜, 그리고 자연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작품마다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결국 사람을 이야기하고, 개인의 삶을 노래하면서도 공동체와 시대를 함께 품는 것이 그의 시조가 지닌 힘이다.
<나목에도 꽃이 피네>는 한 권의 시조선집을 넘어, 한 사람의 삶이 빚어낸 인생의 기록이며 우리 전통 시조가 오늘에도 살아 숨 쉬는 문학임을 증명하는 귀한 결실이다. 겨울나무 끝에 피어나는 꽃처럼, 김보환 시인의 시조는 우리에게 늦은 삶에도 희망은 피어나며, 인생은 끝내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한 긴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 준다.
김보환 시인은 공직자와 문학인이라는 두 길을 성실하게 걸어온 원로 시조시인이다. 의병 정신을 가문의 뿌리로 이어받아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했고, 인생 후반에는 시조를 통해 자연과 역사, 가족과 인간애를 노래해 왔다.
그의 작품은 화려한 기교보다 삶에서 길어 올린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며, 자연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길을 찾으려는 따뜻한 시선이 일관되게 흐른다.
아흔을 넘긴 오늘에도 그는 "망백이 출발"이라고 말하며 새로운 작품을 써 내려간다. 그의 문학은 나이를 초월한 생명의 의지이며, 우리 전통 시조가 지닌 깊은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이어 가는 소중한 자산이다.
나목은 죽은 나무가 아니다. 겨울을 견디며 봄을 준비하는 생명의 다른 이름이다.
김보환 시인의 <나목에도 꽃이 피네>는 바로 그 기다림의 미학을 들려준다. 시인은 긴 세월을 지나 마침내 깨닫는다. 꽃은 젊음의 특권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낸 생명의 훈장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 시조선집은 노년의 기록이 아니라 새로운 봄을 향한 출발의 노래다. 나목 끝에 피어난 작은 꽃 한 송이가 우리 모두의 내일을 향한 희망이 되기를, 그리고 우리 문단에도 오래도록 향기로운 시조의 꽃을 피워 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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