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하노이=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러시아의 대표적인 국제문화잡지 <자루베좀(Zarubejom)>이 최근 베트남작가협회장인 시인 응우옌 꽝 티에우(Nguyễn Quang Thiều)를 집중 인터뷰하며 베트남 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조명했다.
지난 3일 발행된 <자루베좀>은 응우옌 꽝 티에우 회장의 사진을 표지 화면에 배치하고, '베트남이 지닌 문화유산 가운데 번역·출판된 작품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라는 그의 발언을 제목으로 내세웠다.
이어 베트남이 BRICS 파트너 국가로 참여한 이후 문학의 세계화 전략과 문화외교, 인공지능(AI) 시대의 문학, 그리고 세계 독자들에게 가장 먼저 소개해야 할 베트남 문학 고전 등을 폭넓게 다뤘다.
"문화는 길이고, 정치는 그 길을 달리는 교통수단일 뿐이다"
베트남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번역가, 소설가이며 베트남작가협회 회장인 응우옌 꽝 티에우(Nguyễn Quang Thiều)가 러시아의 권위 있는 대표적인 국제문화잡지 <자루베좀(Zarubejom)>과의 인터뷰를 통해 문학의 본질과 문화외교, 인공지능(AI) 시대의 창작, 그리고 베트남 문학의 세계화 전략을 진솔하게 밝혔다.
이번 인터뷰는 베트남작가협회 공식 웹진(VANVN)이 전문을 소개하면서 아시아 문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문학은 가장 먼저 평화를 만든다"
응우옌 꽝 티에우 회장은 문학을 "국경과 이념을 넘어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가장 오래된 언어"라고 정의한다.
그는 베트남전 이후 미국과 베트남이 아직 외교 정상화를 이루지 못했던 시기에도 양국의 작가들은 먼저 서로를 만나 이해와 화해의 물꼬를 텄다고 회고했다. 문학은 정치보다 먼저 마음의 국경을 허무는 힘을 지녔으며, 한 편의 시와 한 권의 책이 평화의 다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BRICS는 베트남 문학의 새로운 창"
2025년 베트남의 BRICS 파트너국 참여는 베트남 문학의 국제적 확장을 위한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번역과 출판의 확대 못지않게 문학 행정과 문화정책의 개방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가장 큰 장애물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경직된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했다.
BRICS는 무엇인가
BRICS는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의 영문 국가명 첫 글자를 딴 국제 협의체다.
2009년 출범한 이후 신흥경제권을 대표하는 협력체로 성장했으며, 최근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아랍에미리트(UAE), 이집트, 에티오피아, 인도네시아 등이 새롭게 참여하면서 정치·경제·문화 분야를 아우르는 국제 협력 플랫폼으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베트남은 2025년 BRICS의 파트너 국가(Partner Country)로 참여하게 되면서 경제협력뿐 아니라 문화와 교육, 출판, 번역, 예술 교류 분야에서도 새로운 협력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응우옌 꽝 티에우 회장이 이번 인터뷰에서 BRICS를 특별히 언급한 것도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BRICS를 단순한 경제협의체가 아니라, 베트남 문학이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 남미를 거쳐 세계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문화 네트워크로 바라보고 있다.
그가 강조한 "베트남 문학이 BRICS 국가에서 먼저 읽히고, 그 울림이 다시 세계로 확산되기를 바란다"는 발언은 문학의 세계화가 특정 언어나 서구권 중심의 출판시장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문화권과의 상호 교류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대적 인식을 담고 있다.
최근 BRICS는 정상회의뿐 아니라 문화장관회의, 출판포럼, 청년교류, 영화·예술 축제 등 문화 분야 협력도 확대하고 있다. 이에 따라 회원국과 파트너 국가 간 번역 출판, 문학행사, 작가 교류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베트남은 2025년 BRICS 파트너 국가(Partner Country)로 참여하게 됐다. 정식 회원국(Member)은 아니지만, BRICS 협력 체계에 참여함으로써 경제 분야는 물론 문화·교육·출판·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의 폭을 넓혀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변화는 베트남 문학계에도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 문학계 역시 BRICS를 중심으로 확대되는 문화·출판 협력과 번역 네트워크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AI와 경쟁하지 말고 인간을 회복하라"
응우옌 꽝 티에우 회장은 AI 시대에 대해서는 "기계와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인간의 존엄과 창조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AI는 문장을 만들 수 있지만 삶의 체험과 상처, 사랑과 연민, 기억과 영혼은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문학관이다. 따라서 작가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생명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것이 문학이다
응우옌 회장은 자신의 대표 시집 <불의 불면(Sự mất ngủ của lửa)>과 2026년 발표한 장시 <도살장(Lò mổ)>을 예로 들며 "문학은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용기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했다.
익숙한 형식과 안전한 언어를 반복하는 순간 문학은 생명력을 잃게 되며, 새로운 문학은 늘 위험을 감수하는 창조적 모험 속에서 태어난다고 말했다.
베트남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응우옌 꽝 티에우 시인
1957년 하노이 인근 하떠이(Hà Tây)에서 태어난 응우옌 꽝 티에우는 시인, 소설가, 수필가, 번역가, 언론인이자 화가로 활동하며 베트남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자리매김했다.
1992년 시집 <불의 불면(Sự mất ngủ của lửa)>으로 베트남 시단에 새로운 언어와 감수성을 제시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여인의 나무>, <시간의 노래> 등 다수의 시집과 소설, 산문집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한국어·스페인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2018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수여하는 창원KC국제문학상을 수상해 베트남 작가로는 처음으로 이 상을 받은 인물이 됐다.
2020년부터 베트남작가협회 회장을 맡아 국제문학교류 확대와 젊은 작가 양성, 번역 출판 지원에 힘쓰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국과의 문학 교류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삶과 인간을 노래하는 작품세계
응우옌 꽝 티에우의 시는 전쟁 이후 베트남 사회가 겪은 상처와 치유, 인간의 존엄, 자연과 생명의 순환을 깊은 서정성과 상징으로 담아낸다.
현실을 직접 고발하기보다 이미지와 은유를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는 그의 시는 동양적 사유와 현대적 감각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발표한 장시 <도살장(Lò mổ)> 역시 인간성과 폭력, 생명의 가치를 정면으로 성찰한 문제작으로 베트남 문단의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세계가 먼저 읽어야 할 베트남 문학 세 작품
응우옌 회장은 세계 독자들에게 가장 먼저 번역·소개해야 할 작품으로 세 편의 고전을 꼽았다.
첫 번째는 응우옌 두(1765~1820)의 <트루옌 끼에우(Truyện Kiều)>이다.
3,254행의 운문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조선의 <춘향전>에 비견될 만큼 베트남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문학이다. 한 여성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인간의 운명과 사랑, 효와 희생, 정의와 자비를 노래하며 "베트남인의 영혼을 담은 책"으로 불린다.
두 번째는 남까오(Nam Cao)의 <찌페오(Chí Phèo)>이다.
1941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식민지 시대 농촌사회의 모순과 인간성의 파괴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베트남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다. 사회적 폭력 속에서 괴물이 되어가는 한 인간의 비극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세 번째는 부쫑풍(Vũ Trọng Phụng)의 <소도(Số đỏ)>이다.
1936년에 발표된 장편소설로 식민지 시대 도시 중산층의 허위와 위선, 서구 문명의 맹목적 추종을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베트남 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풍자소설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응우옌 회장은 이 세 작품이 "베트남인의 정신과 언어, 역사와 인간성을 가장 깊이 담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독자들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문화가 국가의 미래를 만든다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남긴 문장은 "문화는 길이고, 정치는 그 길을 달리는 교통수단"이라는 말이었다.
문화는 국가의 정신이며 문학은 그 정신을 가장 오래 보존하는 그릇이라는 그의 신념은 오늘날 한국과 베트남 모두가 새겨볼 만한 메시지다.
응우옌 꽝 티에우 회장의 이번 인터뷰는 단순한 문학인의 소회를 넘어 오늘날 아시아 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하나의 문화 선언으로 읽힌다.
문학은 번역을 통해 세계로 나아가지만, 그 출발점은 언제나 자기 언어와 자기 문화에 대한 깊은 신뢰다. 세계화는 자기다움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다움을 가장 깊이 지켜낼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는 거듭 강조했다.
한국과 베트남은 오랜 역사 속에서 전쟁과 분단, 식민과 산업화를 경험하며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문학이 인간의 존엄과 평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꿈을 품고 있다. 이러한 공감대는 양국 문학 교류의 든든한 토대가 될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기술과 자본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한 편의 시와 한 권의 책이다.
응우옌 꽝 티에우 회장이 들려준 문학의 철학은 베트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문학이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붙들어야 할 보편적 가치이기도 하다.
문학은 국경을 넘고, 문화는 시대를 잇는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한국과 베트남은 시와 소설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서로의 미래를 함께 써 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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