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최근 한국 시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문학 장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디카시이다.
디지털카메라와 스마트폰으로 포착한 한 장의 사진에 짧지만 깊은 울림을 지닌 시를 결합한 디카시는 디지털 시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시 형식으로 자리매김하며 한국을 넘어 세계 문단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순간의 이미지를 언어의 사유로 확장하는 디카시는 단순한 사진 설명이 아니라, 시적 상상력과 압축된 언어미학, 그리고 영상예술이 결합된 현대문학의 새로운 장르로 평가받는다.
최근에는 국내외 디카시 창작과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며 한국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랫동안 한국 현대시의 중심을 지켜온 이승하 시인(중앙대학교 명예교수)이 첫 디카시집 <세상의 둥근 것들>(도서출판 작가)을 출간했다.
오랜 시력(詩歷)과 사진에 대한 깊은 안목이 만나 탄생한 이번 시집은 한국 디카시 문학의 새로운 성과이자, 한 시인이 삶의 끝없는 성찰 끝에서 길어 올린 따뜻한 희망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이번 시집은 '한국디카시 대표시선' 제42권으로 출간됐으며 모두 4부 60편의 디카시를 수록했다.
시인이 직접 촬영한 사진과 압축된 언어가 만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발견한 삶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존엄, 자연의 생명력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이승하 시인은 오랫동안 인간의 폭력성과 시대의 상처를 응시해 온 대표적인 현실참여 시인이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는 고통을 통과한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따뜻한 세상과 둥근 삶의 풍경을 조용히 노래한다.
이번 디카시집은 시인의 오랜 사진 작업의 결실이기도 하다. 그는 10여 년 동안 기업 사사(社史)를 제작하며 수많은 사진을 선별하고 캡션을 쓰는 일을 담당했다. 이러한 경험은 첫 시집 <폭력과 광기의 나날>에 42장의 사진을 수록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이후 사진시선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을 출간하며 사진과 시의 융합을 꾸준히 시도해 왔다.
이승하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살아보니 세상은 따뜻한 곳도 있고 둥글기도 하였다. 둥근 것들을 모았지만 스마트폰으로 찍지 않은 것도 있으니 디카시집이 아니라 사진시집이라고 해야 할까"라고 적고 있다.
이 한마디는 시대의 상처를 노래했던 시인이 마침내 세상의 둥근 모서리를 발견하게 된 긴 문학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삶의 풍경을 시로 건져 올린 60편의 디카시
제1부는 '다정하구나'를 시작으로 '이별 약속', '이봉주의 발', '노숙자 고양이', '얌전한 주검', '찢어진 얼굴', '광주리를 짊어지고', '삽 든 사내' 등을 통해 노동과 가난, 상처받은 생명,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거친 현실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존재들의 모습을 사진과 시가 함께 증언한다.
제2부에서는 '배의 일생과 사람의 일생', '동굴 바깥', '겨울의 빛', '꽃 본 잠자리', '기다려야 합니다', '꽃과 바위', '오늘도 사공은','「잠자리의 날개' 등을 통해 자연과 인간, 시간과 생명의 순환을 노래한다. 작은 풍경 하나에서도 삶의 철학을 길어 올리는 시인의 사유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제3부는 '현장에서', '닦으면서', '마중물과 수돗물', '비나이다', '와불을 사진 찍다', '세상의 둥근 것들', '손자와 할머니' 등을 수록했다. 가족과 일상, 신앙과 희망, 웃음과 사랑을 통해 상처 입은 삶을 위로하고,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기적인지를 조용히 일깨운다.
제4부에서는 '두 스님과 여성', '닭 파는 할머니,', '점치는 할머니', '교련복 입은 아버지', '염소의 운명', '무덤과 사람', '소가 싸운다', '옛날 이발관에서', '밥과 술', '염소야 집으로 가자' 등을 통해 세월과 기억, 죽음과 삶, 인간과 자연이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를 깊이 있게 성찰한다.
이처럼 시인은 특별한 사건보다 길가의 꽃 한 송이, 늙은 나룻배 한 척, 시장의 할머니, 노숙자 고양이, 손자의 웃음 같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시를 발견한다
사진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시적 사유의 출발점이 되고, 짧은 언어는 긴 여운을 남기며 독자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세상의 둥근 것들』은 사진과 시가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며 완성한 현대적 서정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집이라 할 수 있다.

시대를 증언한 시인, 이제는 삶의 온기를 노래하다
1960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이승하 시인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에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통과한 세대답게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의 시대적 상처를 작품 속에 깊이 새겨 넣었다. 폭력과 억압,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가치를 일관되게 탐구하며 한국 현실참여시의 중요한 흐름을 이끌어 왔다.
또한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와 명예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문인을 길러낸 교육자이자 연구자로서 창작과 문학교육을 함께 발전시켜 왔다.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과 한국문예창작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문단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고, 세계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한국문학과 생태문학을 소개하는 학술 활동을 활발히 이어왔다.
시집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를 비롯해 <폭력과 광기의 나날>, <뼈아픈 별을 찾아서>,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감시와 처벌의 나날>, <사랑의 탐구>,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폭력>, <생명에서 물건으로>,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등은 한국 현대시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이와 함께 사진시선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 윤동주>, <최초의 신부 김대건>, <마지막 선비 최익현>,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집 떠난 이들의 노래>, <욕망의 이데아> 등 방대한 저술을 통해 시인과 소설가, 평론가, 전기작가, 문학연구자의 영역을 두루 개척하며 한국 문학의 지평을 넓혀 왔다.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 지훈상, 시와시학상 작품상, 천상병귀천문학대상, 편운상, 유심작품상 등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하며 창작과 학문 양 분야에서 모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명실상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문학자이다. 이번 첫 디카시집 <세상의 둥근 것들>은 이승하 문학의 또 하나의 아름다운 전환점이다.
시대의 폭력과 인간의 고통을 치열하게 응시해 온 시인이 이제는 사진과 시를 통해 일상의 작은 풍경 속에서 희망과 화해, 생명의 온기를 길어 올린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결과물이 아니라, 반세기에 가까운 창작과 연구, 교육과 비평의 길 위에서 축적된 삶의 철학이 사진과 시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피어난 결실이다.
<세상의 둥근 것들>은 독자들에게 세상은 아직도 둥글고,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품을 수 있으며, 시는 결국 생명을 향해 걸어가는 가장 따뜻한 언어임을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전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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