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본지 편집국장) =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오래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사람이 책을 만들지만, 책은 다시 사람의 생각을 만들고 삶의 방향을 바꾼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그렇게 달라진 한 사람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런 사회를 꿈꾼다. 동네에 파출소 하나가 더 생기는 것만큼이나 서점 하나가 더 생기는 사회. 술집 하나가 더 들어서는 것만큼 작은 도서관 하나가 더 생기는 사회.
출퇴근길 흔들리는 버스와 지하철에서도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는 사람들 사이로 책장을 넘기는 사람이 보이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반드시 더 안전하고 평화롭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사람의 마음을 조금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사회가 아닐까.
황금알을 낳는 땅에 서점을 세운 까닭
광화문 교보문고를 생각하면 책의 가치가 더욱 선명해진다. 1980년대 초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대형 서점을 세우는 일은 당시의 경제적 논리만 놓고 보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백화점이나 다른 상업시설을 세웠다면 당장의 수익은 더 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교보생명 창업자 신용호 회장은 다른 선택을 했다. 사람과 책의 미래에 투자했다. 그 선택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문화가 됐다.
광화문의 서점은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매장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책을 만났고, 작가를 만났으며,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다.
누군가에게는 첫 책을 산 곳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처음 시집을 펼친 곳이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책 한 권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아 서가 앞에 오래 서서 책을 읽던 곳이었을 것이다. 그 수많은 기억이 쌓이면 서점은 더 이상 매장이 아니다.
한 사회의 지성이 머무는 공간이 된다.
서점은 물건이 아니라 미래를 판다
책 한 권의 가격만 보면 책은 그리 비싸지 않다. 하지만 책 한 권이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가격으로 계산할 수 없다.
어린 시절 우연히 읽은 한 문장이 평생의 좌우명이 되기도 하고, 어느 날 펼친 시집 한 권이 문학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절망의 순간 책 속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서점을 '미래를 파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책 한 권을 산 사람이 내일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가가 될 수도 있고, 교사가 될 수도 있다. 과학자가 될 수도 있고 의사가 될 수도 있다. 혹은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이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책을 읽은 사람의 마음에는 읽기 전에는 없던 하나의 창문이 생긴다. 그 창문을 통해 세상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파출소가 필요한 사회에서, 파출소가 덜 필요한 사회로
물론 파출소는 필요하다. 범죄를 예방하고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경찰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꿈꾸어야 할 사회는 파출소가 많아서 안전한 사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애초에 범죄와 폭력이 줄어들어 파출소의 문을 두드릴 일이 적어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책과 도서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책이 범죄를 직접 막아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책은 사람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상하게 하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한다. 분노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하고,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을 길러준다.
그래서 나는 동네에 파출소 하나를 더 짓는 일과 함께, 작은 서점 하나와 작은 도서관 하나를 더 만드는 사회를 꿈꾼다. 안전을 지키는 공간과 마음을 키우는 공간이 함께 있는 사회 말이다.
술집 하나보다 도서관 하나가 반가운 이유
동네를 걷다 보면 술집은 쉽게 만난다. 그러나 작은 도서관이나 동네 서점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술집을 비난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에게는 때로 술 한잔을 나누며 마음을 풀어놓는 시간도 필요하다.
다만 한 동네의 공간이 소비와 유흥을 향해서만 늘어나는 것은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아이들이 갈 곳이 있어야 하고, 청년들이 책을 읽고 꿈을 설계할 공간이 있어야 한다.
노년의 사람들이 조용히 책을 펼치며 하루를 보낼 곳도 있어야 한다. 누구나 돈 걱정 없이 책 한 권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크고 화려한 도서관보다 골목 안 작은 도서관이 더 반갑다.
책장 몇 개면 어떠한가. 의자 몇 개면 또 어떤가. 창가로 햇빛이 들어오고, 책을 읽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좋다. 그곳에서 누군가 자신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면 그 공간은 이미 충분히 큰 도서관이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책장을 넘기는 풍경
오늘 우리의 손에는 언제나 스마트폰이 들려 있다.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화면을 들여다본다. 지하철에서도 수많은 시선이 작은 화면을 향한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생각할 시간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짧은 영상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한 문장을 오래 붙잡고 생각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아주 오래된 풍경을 꿈꾼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책장이 살짝 흔들리고, 옆자리 사람이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해지는 풍경. 지하철에서 누군가 시집을 펼쳐 들고 있는 풍경. 카페 한쪽에서 젊은이가 책에 밑줄을 긋고 있는 풍경. 아이와 부모가 함께 도서관을 나오는 풍경. 스마트폰보다 책이 더 자주 눈에 띄는 사회.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디지털 기술을 거부하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오히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힘을 갖자는 이야기다.
책은 사람을 혼자 있게 하지만 외롭게 하지는 않는다
책을 읽는 사람은 혼자다. 그러나 결코 혼자가 아니다. 책 속에는 작가의 삶이 있고, 한 시대의 이야기가 있으며, 수많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과 대화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수백 년 전의 사람과 생각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책은 가장 조용한 대화다. 동시에 가장 값싼 여행이기도 하다.
한 권의 책이면 다른 나라로 갈 수 있고, 다른 시대를 살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마음속까지 들어갈 수 있다. 이런 경험을 어린 시절부터 많이 한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분명 다를 것이다.
책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다시 세상을 만든다
나는 오랫동안 신문을 만들고 글을 써왔다.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수많은 책을 읽었다. 돌아보면 신문 역시 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시대의 생각을 남기며 누군가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결국 기록은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일이다.
책도 그렇고 신문도 그렇다.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된다. 오늘 읽은 한 문장이 내일의 한 사람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니 책을 만드는 사람도, 책을 읽는 사람도 중요하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책을 읽고 성장한 사람이 다시 새로운 책을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이 선순환이야말로 한 사회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자산이 아닐까.
책 읽는 사람이 많은 나라를 꿈꾼다
나는 거창한 문화정책보다 먼저 동네의 풍경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비어 있는 상가 한쪽에 작은 서점이 들어서고, 골목 한편에 동네 도서관이 생겼으면 좋겠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갈 곳이 없어 거리를 배회하는 대신 책방에 들르고, 퇴근한 직장인이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시집 한 권을 펼쳤으면 좋겠다.
주말이면 부모와 아이가 함께 책을 고르는 풍경도 보고 싶다. 그런 동네가 하나둘 늘어났으면 좋겠다.
책 읽는 사람이 많은 나라. 책을 읽는 사람이 존중받는 나라. 작가의 이름보다 책의 내용이 먼저 이야기되는 나라. 돈이 없어도 책을 읽을 수 있고, 나이가 많아도 배울 수 있으며, 어린아이도 존중받으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나라. 나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우리 동네에 책 한 권의 자리를 만들자
사회가 안전해지기를 원한다면 파출소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가 따뜻해지기를 원한다면 도서관이 필요하다. 경제가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기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다시 처음의 문장으로 돌아간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동네에 파출소 하나를 더 세우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서점 하나를 더 세우는 일 역시 중요하다. 술집 하나가 더 생기는 것보다 작고 소박한 도서관 하나가 더 생기는 일이 반가운 사회.
흔들리는 대중교통 안에서도 스마트폰만 바라보지 않고 책 한 권을 펼쳐 드는 사람이 더 많은 사회. 나는 그런 대한민국을 꿈꾼다.
그리고 그 꿈은 거창한 곳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 동네에 책 한 권을 놓을 자리 하나를 만드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어쩌면 그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을 만들고, 그 한 사람이 한 동네를 바꾸고, 그렇게 바뀐 동네들이 모여 마침내 한 나라의 미래를 바꿀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책이 있는 동네에는 사람이 자라고, 사람이 자라는 동네에는 미래가 자란다. 오늘 우리 동네에 책 한 권 놓을 자리를 만들어보자. 그곳에서 누군가의 내일이 조용히 시작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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