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무대 위의 조명은 꺼지고 배우들은 퇴장했지만, 공연이 남긴 질문과 감동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한 편의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며 웃고 울고 감동하는 순간, 그 작품의 뒤편에는 문학과 역사, 사회의 변화, 인간의 욕망과 상처가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 있다.
문학 연구자이자 시인, 문화비평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오대혁 작가가 이러한 '무대 너머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풀어냈다.
지난 8월 20일 출간된 <무대에 홀리다-한국인이 사랑한 뮤지컬과 연극 읽기>(아마존의나비)는 대중에게 친숙한 뮤지컬과 연극을 원작과 시대적 배경, 서사와 인물, 사회적 의미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게 하는 공연예술 감상 안내서다.
264쪽으로 구성된 이 책은 단순한 공연 줄거리나 작품 평가에 머물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 만나는 한 편의 이야기가 어디에서 출발했으며, 원작이 공연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오늘의 관객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를 차근차근 짚는다.
'보는 공연'에서 '읽는 공연'으로
<무대에 홀리다>의 가장 큰 특징은 공연을 하나의 독립된 볼거리로만 바라보지 않는 데 있다
. 저자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시카고>, <드라큘라>, <캐츠>, <포미니츠>, <블랙 메리 포핀스>, <식스>, <맨 오브 라만차>, <영웅본색>, <젠틀맨스 가이드>, <영웅>, <맘마미아!>, <틱, 틱… 붐> 등을 차례로 따라가며 작품의 원작과 탄생 배경, 시대적 의미, 인물의 변화, 무대적 특징을 살핀다.
연극 부문에서는 <앙리 할아버지와 나>, <너, 돈끼호떼>, <그대는 봄>, <폭풍의 언덕>, <협상 1948>, <오만과 편견>을 통해 연극이 품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따라서 독자는 이미 관람했던 작품을 새로운 시선으로 되돌아볼 수 있고, 아직 보지 못한 작품에 대해서는 공연장에 가기 전 또 하나의 감상법을 얻을 수 있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영웅>까지… 무대가 품은 인간의 얼굴
<오페라의 유령>에서는 가스통 르루의 원작과 뮤지컬의 차이를 살펴보며 가면 뒤에 가려진 팬텀의 사랑과 고독을 들여다본다.
화려한 재즈와 춤으로 유명한 <시카고>는 단순한 오락물이 아니다. 저자는 범죄와 선정적인 사건마저 대중의 흥미를 끌기 위한 상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언론과 대중사회의 민낯을 읽어낸다.
<드라큘라>에서는 공포의 상징이었던 흡혈귀가 어떻게 사랑의 존재로 변주됐는지를 살피고, <캐츠>에서는 고전문학이 현대의 무대 언어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바라본다.
특히 <식스>에 대한 접근은 역사 속 여성의 목소리를 되살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헨리 8세의 여섯 왕비를 현대의 팝스타처럼 무대에 세움으로써 역사의 주변부에 머물렀던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도록 만든 작품의 의미를 짚는다.
<영웅> 역시 안중근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단순한 영웅 신화 속 인물로 바라보지 않는다. 신념과 두려움 사이에서 결단해야 했던 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역사적 인물을 현재의 관객에게 다시 불러낸다.
<맘마미아!>와 <틱, 틱… 붐>에서는 보다 일상적인 질문을 만난다. 사랑과 결혼, 꿈과 선택, 나이 듦과 시간에 대한 고민이다.
결국 이 책이 들려주는 무대의 이야기는 특정한 공연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랑하고,*꿈꾸고, 선택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는 인간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문학 연구자의 깊이와 공연 애호가의 설렘
제주 출신인 오대혁 작가는 동국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설잠 김시습과 <금오신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동국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제주일보> 논설위원, 계간 <문학리더스> 주간, 한국전통등연구원 연구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학 연구자이면서 시인이고, 문화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인 그의 이력은 이번 책의 성격과도 맞닿아 있다.
고전문학에 대한 연구 경험은 공연 속 원작과 서사의 뿌리를 찾아가는 데 깊이를 더하고, 공연예술을 바라보는 애정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들을 친숙하고 생생하게 풀어내는 힘이 된다.
무대 위 한 장면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어느 순간 문학과 역사, 영화와 대중음악, 사회와 인간의 문제로 확장되는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때문에 <무대에 홀리다>는 공연을 잘 모르는 독자에게는 입문서가 될 수 있고, 공연을 즐겨온 관객에게는 이미 알고 있던 작품을 다시 발견하게 하는 해설서가 될 수 있다.
공연 사이에 놓인 ‘인터미션’의 의미
책의 구성에서도 저자의 독특한 시선이 드러난다.
뮤지컬과 연극 작품 사이사이에 'Intermission'이라는 이름으로 국립정동극장, 마술 공연, 우리 소리와 트로트 등에 관한 이야기를 배치했다.
특히 '국립정동극장: 최고의 공연 예술을 낳을 플랫폼', '더 일루션-마스터피스: 일상을 살아내는 게 마법이다', '풍류대장, 그 너머: 우리 소리의 가능성과 트로트 열풍의 속사정' 등은 책의 시선을 개별 작품에서 공연예술 전반으로 넓혀준다.
이러한 구성은 독자로 하여금 ‘공연이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까지 생각하게 한다.
연극, 그곳에서도 인간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책의 2부 '연극을 읽다'에서는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여섯 작품을 통해 연극이 지닌 또 다른 힘을 탐색한다.
<앙리 할아버지와 나>에서는 비루해 보이는 삶 속에서도 사랑과 용기가 어떻게 피어나는지를 살피고, <너, 돈끼호떼>에서는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대는 봄>은 한국형 여성 버디의 가능성을, 『폭풍의 언덕』은 시대를 초월하는 사랑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또한 <협상 1948>에서는 평화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묻고, <오만과 편견>에서는 결혼과 인간관계를 둘러싼 이야기를 2인극이라는 독특한 형식과 연결해 읽는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창작 오페라 '순이 삼촌'과 소프라노 강혜명의 꿈을 통해 한국 공연예술의 창작 현장과 앞으로의 가능성을 바라본다.
좋은 공연은 막이 내려도 끝나지 않는다
<무대에 홀리다>가 던지는 핵심적인 질문은 어쩌면 단순하다.
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보는가. 왜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또 눈물을 흘리는가. 왜 오래된 사랑과 꿈, 좌절과 희망의 이야기에 다시 마음을 빼앗기는가.
저자는 그 답을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서만 찾지 않는다. 좋은 공연은 관객에게 이야기를 보여주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을 남기기 때문이다.
팬텀의 고독을 바라보다 자신의 외로움을 생각하고, 돈키호테의 불가능한 꿈을 보며 아직 포기하지 못한 자신의 꿈을 떠올린다. 역사 속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다가 지금 우리의 삶에서 사라진 목소리를 생각하게 되고, 『영웅』의 결단 앞에서는 시대와 인간의 책임에 대해 되묻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연은 무대 위에서 끝나는 예술이 아니다.
막이 내린 뒤 관객의 마음속에서 제2의 공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공연의 정답이 아니라 자기만의 질문을 찾도록"
<무대에 홀리다>는 특정 작품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작품을 바라보는 여러 개의 창을 열어 놓고 독자 스스로 자기만의 감상과 질문을 찾아가도록 이끈다.
문학 작품이 시대에 따라 새롭게 읽히듯 공연 역시 관객의 삶과 시대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같은 작품이라도 젊은 날과 중년, 혹은 인생의 황혼기에 관람했을 때 마음에 남는 장면이 달라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대혁 작가는 공연을 '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읽는 것'의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문학을 읽듯 무대를 읽고, 역사를 읽듯 인물을 읽으며, 한 시대의 사회상을 읽듯 공연 속에 숨겨진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책을 덮고 나면 다시 공연장이 보인다
<무대에 홀리다>는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지나간 무대를 다시 불러오는 책이고, 공연을 낯설게 느끼는 사람에게는 무대의 문을 열어주는 책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문학과 공연예술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 편의 소설이 무대가 되고, 역사의 한 장면이 노래가 되며, 오래된 인물이 오늘의 관객 앞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그 순간 공연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객석의 박수가 멎은 뒤에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어쩌면 그것이 좋은 공연의 힘이고, <무대에 홀리다>가 독자에게 건네는 가장 아름다운 초대일 것이다.
"막이 내린 뒤,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대를 보는 눈에서 삶을 읽는 눈으로 - 오대혁의 <무대에 홀리다>는 우리가 사랑한 공연의 '막 뒤'를 통해 문학과 역사, 그리고 인간을 다시 만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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