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정유준 시인이 새로운 시집 <초록을 걷다>를 출판사 시간의 물레를 통해 펴냈다.
오랫동안 자연과 나무를 시적 화두로 삼아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나무와 숲, 잎사귀와 계절의 언어를 통해 인간 존재와 세계의 본질을 탐색한다.
<초록을 걷다>는 단순히 자연을 노래하는 시집이 아니다. 시인에게 나무는 한 그루의 식물이기 이전에 지나온 시간의 기억을 품은 존재이며,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고, 삶과 세계의 의미를 묻는 하나의 철학적 공간이다.
나무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인간을 향하고, 숲을 걷는 발걸음은 마침내 자기 존재의 깊은 곳으로 향한다.
나무는 시인에게 하나의 세계관이다
이번 시집의 중심에는 단연 '나무'가 있다.
해설을 쓴 양병호 시인·전북대학교 국문과 명예교수는 정유준 시의 세계를 두고 "시인은 '나무'에 집착한다"며 "편집증으로 오해할 정도"라고 표현하면서, 그 나무가 단순한 자연의 소재가 아니라 자아의 존재론적 성찰을 이끌고 인생의 본질과 세계의 궁극을 이해하게 하는 촉매라고 평한다.
실제로 <초록을 걷다>의 시편들에서 나무는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존재다.
갈참나무와 생강나무, 솔숲과 상수리나무, 붉은 벚나무와 편백나무, 자작나무와 오리나무…. 시인은 각각의 나무가 지닌 이름과 빛깔, 몸짓과 시간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불러내고 삶의 의미를 되묻는다.
나무는 침묵하고 있지만, 시인은 그 침묵에서 가장 깊은 언어를 듣는다. 그리고 그 언어를 통해 외로움과 불안, 상실과 기다림, 평화와 안식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들을 길어 올린다.
◆ 1부 '초록을 걷다'… 나무를 통해 만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시집의 첫 문을 여는 1부 '초록을 걷다'는 제목 그대로 초록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시인의 발걸음을 담고 있다.
'갈참나무 숲길', '생강나무에게 말을 걸다', '솔숲의 외침', '생각이 까치수염을 흔들고', '상수리나무 뒤편', '오래된 나무', '나무로부터', '편백나무 숲, 묘지명' 등은 나무와의 교감을 통해 인간의 시간을 성찰하는 작품들이다.
이곳에서 초록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다.
초록은 지나온 유년의 기억이면서 현재의 삶이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한 희망이기도 하다. 시인은 나무와 대화하며 잃어버린 시간을 되짚고, 늙어가는 존재의 불안을 바라보며, 그럼에도 다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자연 속에서 찾는다.
'초록을 걷는다'는 것은 결국 삶을 걷는 일이며, 자신을 향해 걸어가는 일이다.
◆ 2부 '겨울의 건너편'… 계절을 통해 읽는 세계의 불안과 희망
2부 '겨울의 건너편'에서는 시선이 개인의 내면에서 조금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된다.
안개와 우수, 봄비와 여름, 가을빛과 폭설, 그리고 입춘에 이르기까지 계절의 변화는 시인의 감정과 세계 인식을 움직이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오늘은 안개가', '겨울의 건너편', '우수가 지나고', '비가 개인 뒤', '비의 선물', '아버지의 가을', '메마른 시간', '폭설' 등의 작품에서는 변화무쌍한 자연의 풍경 속에서 불안한 현실과 마주하는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러나 시인은 세계의 불완전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가 내리면 비를 받아들이고, 겨울이 오면 겨울의 시간을 견디며, 폭설이 내리면 그 흰 침묵 속에서 새로운 계절을 기다린다.
그래서 '겨울의 건너편'은 절망의 풍경이 아니라 희망을 향한 시적 인내의 공간으로 읽힌다.
◆ 3부 '차고지 연대기'… 도시의 일상 속에서 기록한 존재의 외로움
3부 '차고지 연대기'에서는 자연의 숲에서 도시의 풍경으로 시선이 이동한다.
'갇혀있다', '차고지 연대기', '밤의 차고지', '공터에서', '푸른 걱정', '불면', '여우·여우고개', '마스크 시대', '전쟁기념관, 이름 앞에', '한글날 순대국밥을 먹었다' 등의 작품은 보다 구체적인 현실의 공간과 사람들을 만난다.
차고지는 떠나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면서 동시에 잠시 멈춰 서야 하는 공간이다.
그곳에는 도시인의 피로와 고독이 있고, 반복되는 일상의 무게가 있으며, 삶을 살아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시간이 있다.
정유준 시인은 이 평범한 풍경 속에서 '존재의 고단함'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의 시는 고단함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하기 때문에 더 소중한 순간들,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 속의 작은 깨달음과 인간적인 온기를 포착한다.
◆ 4부 '제주 詩篇'… 숲과 바다와 바람이 들려주는 섬의 철학
시집의 마지막 4부 '제주 詩篇'은 제주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얻은 시적 사유를 담아낸다.
'숲·榧子', '섭지코지', '제주 바람꽃', '사려니 숲', '곳자왈·비', '숨비소리 길을 걸어서', '온평리·영등할망', '우도·봄날', '겡이 우체통' 등에는 제주 특유의 자연과 생활문화가 깊게 스며 있다.
제주의 숲과 바다, 바람과 돌, 그리고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삶은 시인에게 또 하나의 거대한 자연의 책이 된다.
특히 제주어와 지역의 생활문화가 작품 곳곳에 배어 있어, 관광지로서의 제주가 아닌 삶의 땅으로서의 제주를 만나게 한다.
사려니 숲의 깊은 침묵과 곳자왈의 신비로운 생명력, 바다를 건너는 바람과 우도의 봄날은 모두 시인의 언어 속에서 존재와 시간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태어난다.

자연을 오래 바라본 시인의 깊어진 시선
정유준 시인은 1948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1998년 계간 <문학창조> 공모와 한하운문학상 수상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이후 불어시집
그동안 <사람이 그립다>, <풀꽃도 그냥 피지 않는다>, <물의 詩篇>, <나무의 명상>, <가신길을 묻습니다>, <나날>, <편백나무 숲에서>, <까치수염의 방> 등을 펴내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꾸준히 탐구해 온 시인이다.
그의 문학 여정에서 자연은 언제나 배경이 아니라 주체였다.
꽃은 인간의 마음을 대신해 피었고, 물은 삶의 시간을 흘려보냈으며, 나무는 침묵으로 인간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번 <초록을 걷다>는 그러한 오랜 시적 여정의 연장선에서 더욱 깊어진 작품집이라 할 수 있다.
초록을 걷는다는 것은 결국 삶을 사랑하는 일
<초록을 걷다>는 나무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인간을 이야기하는 시집이다.
숲을 바라보지만 삶을 바라보고, 계절을 노래하지만 시간을 노래하며, 제주를 걷지만 결국 자신의 내면을 걷는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한자리에서 평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 나무 안에는 수많은 계절이 지나가고, 바람과 비와 눈이 머물렀다가 떠난다.
인간의 삶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한 번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계절이 지나간다.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 희망과 절망이 잎처럼 돋아나고 떨어진다.
정유준 시인은 바로 그 삶의 나이테를 읽는다. 그리고 독자에게 조용히 권한다.
때로는 걸음을 늦추어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라고. 그 나무 속에 어쩌면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 있고, 아직 살아가야 할 미래가 있으며, 무엇보다 오늘의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라고.
<초록을 걷다>는 그래서 자연을 사랑하는 독자에게만 권할 시집이 아니다. 삶에 지친 사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사람, 앞으로의 길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이 시집은 하나의 푸른 쉼표가 되어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나무 곁을 지나왔을까
그러나 정작 한 그루의 나무가 품고 있는 시간을 얼마나 깊이 바라보았을까.
정유준 시인의 <초록을 걷다>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 온 나무에게 다시 말을 걸게 하는 시집이다. 그리고 그 나무의 대답을 듣는 순간, 독자는 깨닫게 된다.
나무는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어쩌면 우리가 너무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초록을 걷다>. 그 초록의 길 끝에서 시인은 나무를 만나고, 나무를 통해 자신을 만나며, 마침내 독자를 삶의 더 깊은 숲으로 이끈다.
초록을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안에 아직 살아 있는 희망을 찾아 걷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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