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423쪽의 장편소설에 새겨진 것은 거대한 역사의 이름이 아니라 그 역사를 견뎌낸 사람들의 얼굴이다.
독립운동과 이념, 해방과 분단, 전쟁과 연좌제라는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한 가족 3대가 겪어야 했던 사랑과 이별, 가난과 기다림 그리고 끝내 놓지 않았던 '꿈'을 따라간다.
지난해 출간한 민병임 작가의 장편소설 <꿈>(소소리출판)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깊은 상처를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1900년대 초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영덕을 비롯한 시대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삶과 한국사의 굴곡을 겹쳐 놓았다.
소설의 출발점에는 1942년과 1943년에 쓰인 한 권의 낡은 일기장이 있다.
빛바랜 일기장은 작가의 손에 들어와 20여 년의 집필 과정과 자료 조사, 역사적 고증을 거치면서 장편소설 <꿈>으로 다시 태어났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역사
<꿈>의 가장 큰 특징은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보다 그 역사의 뒤편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다는 데 있다.
1부는 혁명가 이명근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일제강점기 수차례 서대문형무소를 드나들었던 그는 독립과 조국의 미래를 꿈꾸던 인물이다.
상하이와 난징으로 이어지는 여정, 경성 유학생 시절의 독서클럽, 독립운동가들과의 만남, 형무소 생활과 해방 이후의 혼란이 그의 삶을 관통한다.
그러나 이명근은 단순한 '혁명가'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신념을 위해 가난과 고난을 감수하면서도 가족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했던 한 인간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소설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조국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이 평생 지켜온 신념은 무엇을 남기는가. 역사와 이념 앞에서 가족은 어디에 놓이는가. 그리고 한 인간이 평생 품었던 꿈은 과연 이루어진 것인가.
이 질문들은 이명근 개인의 것이면서 동시에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수많은 사람들의 질문이기도 하다.
혁명가의 딸, 그리고 연좌제의 세월
2부에서는 시선이 이명근의 외손녀 이지유에게 옮겨간다.
북으로 간 아버지를 둔 딸 영이의 삶은 1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역사의 무게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선택한 이념 때문에 남한에 남겨진 가족은 가난과 감시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연좌제라는 시대의 굴레는 가족의 일상을 옥죄었고, 영이는 어린 6남매를 먹이고 키우기 위해 자신의 삶을 뒤로 미뤄야 했다.
그 삶은 거창한 역사적 사건보다 오히려 물레와 놋대야, 옥수수빵과 장떡, 추어탕 같은 생활의 풍경 속에서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꿈>이 보여주는 역사는 교과서의 연대기가 아니다.
역사가 지나간 자리에서 밥을 짓고 아이를 키우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역사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영이의 딸 지유에게 이어진다.
지유는 좌우의 이념 대립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한다.
여성잡지사 기자로 일하고 소설을 쓰며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지유의 삶은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시대를 지나 새로운 세대로 넘어가는 하나의 다리가 된다.
"앞에 있는 자가 아닌 뒤에 있는 자들의 이야기"
작가는 이 작품을 쓰게 된 이유를 비교적 분명하게 밝힌다.
역사의 앞에 선 사람보다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 이름 없이 살아간 사람들, 자신의 신념 때문에 역사에서 묻혀버린 사람들, 가족을 찾고 싶어도 드러내놓고 찾을 수 없었던 이산가족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꿈>의 주인공은 어쩌면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명근도, 영이도, 지유도 모두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낸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을 이어 붙이면 곧 한 세기의 한국 현대사가 된다.
이 작품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념'보다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누가 옳았는가를 단정하기보다 그 선택으로 인해 누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보여준다.
혁명가였던 아버지를 둔 가족의 고통, 북으로 간 가족을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다림, 이산가족의 아픔, 그리고 다음 세대가 그 상처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어진다.
기자에서 소설가로, 35년의 기록 끝에 태어난 <꿈>
민병임(본명 이병임) 작가는 단국대학교 문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잡지사 <여원>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1989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뉴욕한국일보에 입사해 차장, 특집부장, 문화경제부장, 문화경제부국장, 편집위원, 특집국장, 논설위원 등을 거쳤다.
35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27스트리트', '기자수첩', '데스크광장', '민병임칼럼', '살며 느끼며' 등을 통해 수많은 글을 써왔다.
특히 '살며 느끼며'라는 이름으로 1400여 편의 칼럼을 남겼다는 사실은 이번 소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사람과 세상을 오래 관찰해 온 기자의 눈이 소설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1997년 미주한국일보와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입상을 비롯해 미동부한인문인협회 신인작품상을 받았으며, 2017년에는 칼럼집 <족발이든 감자든>을 펴냈다.
언론인으로 세상을 기록해 온 사람이 이번에는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한 가족의 기억과 한국 현대사의 시간을 기록한 셈이다.
미국에서 쓰는 한글, 국경을 넘어선 기억
작가가 미국에서 한글로 소설을 쓰게 된 계기도 의미가 깊다.
1995년 뉴욕을 방문한 최명희 작가가 "미국에서 한글로 글을 쓰면 국경선이 여기까지 확장된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고, 그 말이 작가에게 큰 용기가 되었다고 한다.
'한글로 쓰는 내가 그 안에 있다'는 작가의 고백은 <꿈>의 또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한글은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다. 고향의 기억과 가족의 목소리, 어머니의 삶과 아버지의 흔적을 이어주는 기억의 언어다.
미국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작가가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한국어로 기록했다는 사실은 이 소설이 가진 문화적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
'꿈'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
<꿈>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제목 그대로 '꿈'이다.
이명근에게 꿈은 조국의 독립이었을 것이다.
영이에게 꿈은 가족을 지켜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지유에게 꿈은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세 사람의 꿈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꿈은 이루어졌는가.
소설은 쉽게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사람의 꿈이 다음 사람의 삶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조국이었던 꿈이 누군가에게는 가족을 지키는 일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 된다.
그렇게 보면 <꿈>은 거대한 역사소설이면서 동시에 한 가족의 오래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의 무게보다 오래 남는 것은 사람의 마음
독자들이 "드라마를 보듯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책장을 넘기다가 결국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본 느낌"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는 역사적 사건과 시대적 자료가 들어 있지만, 그것만으로 독자를 붙잡지는 않는다.
토끼몰이로 시작되는 가난한 사람들의 겨울, 어머니가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견뎌낸 세월, 북으로 간 가족을 향한 그리움, 이산가족의 상처와 늦은 만남 같은 구체적인 삶의 장면들이 역사에 체온을 불어넣는다.
결국 <꿈>이 말하는 것은 이념의 승패가 아니다.
그 이념과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낸 사람들의 삶이다.
누군가는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누군가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삶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민병임의 <꿈>은 바로 그 사라질 뻔한 삶들을 다시 불러내는 소설이다.
한 권의 낡은 일기장이 20여 년의 시간을 건너 423쪽의 소설이 되었다.
일기장 속에 남겨진 것은 지나간 사람들의 기록이었지만, 작가는 그것을 오늘의 독자에게 건넨다.
어쩌면 '꿈'이란 이루어진 미래의 이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다음 사람의 가슴에 남아 계속 살아가는 마음의 이름인지 모른다.
역사는 거대한 사건으로 기억되지만, 삶은 작은 기억으로 이어진다.
<꿈>은 그 작은 기억들이 모여 한 시대의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운다.
그리고 책장을 덮고 나면 오래 남는 질문 하나가 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오늘은, 앞선 세대가 끝내 이루지 못한 어떤 꿈의 다음 장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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