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관광협회, 전국기자단 초청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공주·부여·익산 팸투어 진행

2023.12.10 17:40:14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유적을 되돌아보고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백제문화의 가치와 우수성 홍보

(공주·부여·익산=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재)백제세계유산센터(이사장 김기영)가 주최하고 전라북도관광협회(회장 조오익)가 주관한 전국기자단 초청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팸투어가 지난 7일부터 8일까지 1박 2일 일정으로 공주·부여·익산 일원에서 진행됐다.

이번 전국기자단 초청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팸투어는 전문 문화 해설사의 안내로 공주를 비롯하여 부여, 익산 등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유적을 되돌아볼 수 있는 행사로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백제문화의 가치와 우수성을 널리 알린다는 취지다.

이는 2015년 대한민국에서 12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를 통해 삼국시대 당시 백제문화의 아름다움을 되새기는 의미가 있다.

세계유산이란 인류가 남긴 보편·탁월한 가치를 지닌 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매년 총회를 열어 신청유산의 심사를 거쳐 등재를 결정한다.

우리나라에는 1995년 석굴암·불국사를 시작으로 2016년 현재, 12건이 등재되었다.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가 포함된 익산·공주·부여의 백제문화유산 8건이 백제의 왕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고고학적 유적으로, 문화발전의 절정기인 백제 후기 문명을 대표하고 있다는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 국내에서는 12번째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대한민국 중서부 산지에 위치한 백제의 옛 수도였던 3개 도시에 남아있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유적은 이웃한 지역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고대 백제 왕국의 후기 시대를 대표한다.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어 660년에 멸망할 때까지 700년 동안 존속했던 고대 왕국으로, 한반도에서 형성된 초기 삼국 중 하나였다.

공주 웅진성(熊津城)과 연관된 ▲공산성(公山城)과 송산리 고분군(宋山里 古墳群), 부여 사비성(泗沘城)과 관련된 ▲관북리 유적(官北里遺蹟, 관북리 왕궁지) 및 부소산성(扶蘇山城), 정림사지(定林寺址), 능산리 고분군(陵山里古墳群), 부여 나성(扶餘羅城), 그리고 끝으로 사비시대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던 익산시 지역의 ▲왕궁리 유적(王宮里 遺蹟), 미륵사지(彌勒寺址) 등으로, 이들 유적은 475년~660년 사이의 백제 왕국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백제역사유적은 중국의 도시계획 원칙, 건축 기술, 예술, 종교를 수용하여 백제화(百濟化)한 증거를 보여주며, 이러한 발전을 통해 이룩한 세련된 백제의 문화를 일본 및 동아시아로 전파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대부분 백제후기(475~660)의 유산으로 궁궐, 성곽, 사찰, 왕릉이 포함돼 있는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의 문화유산이자, 그 시대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와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여행의 첫 역사 탐방은 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부터 시작되었다.

금강을 품고 있는 백제의 고도(古都) 공주는 백제 웅진 시대의 문화, 역사는 물론 천년고찰, 유적지 등 볼거리가 많아 역사 여행지로 제격이다.

백제로의 여행은 공주를 1,500년 넘게 지켜온 공산성에서 시작해도 좋고, 백제의 진수를 볼 수 있는 무열왕릉에서도 좋다.

어느 곳에서 시작하던 공주 자체가 역사박물관이라 백제의 숨결을 느끼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은 삼국시대의 성곽으로, 백제가 웅진에 수도를 두었던 문주왕 원년(475)부터 한성에서 웅진으로 이주한 후 성왕 16년(538년)에 사비로 옮길 때까지 약 63년간 도성이었으며 그 후 신라·고려·조선 시대에도 행정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공산성은 사적 제12호로,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산성동에 걸쳐 있는 약 20만㎡ 규모의 거대한 산성으로 산성의 북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성곽의 길이는 2,660m이며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으로 원래 백제 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시대 대부분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공산성은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리다가 고려 시대 공산성으로 불린다.

고구려의 제20대 국왕 장수왕(長壽王, 394년~491년)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의 제22대 국왕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년 9월~477년 4월)은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한 공주로 수도를 급하게 옮기면서 공산성을 축조했다.

백제의 제31대, 마지막 국왕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년~660년)은 멸망 직후 이곳에 잠시 머물렀으며, 이후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한다.

공산으로 불리는 산은 남쪽으로 공주시가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금강의 물줄기와 접한다. 동남쪽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지 외곽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전체가 병풍이 돌려진 천연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공산성은 산봉우리를 연결하고 계곡을 가로질러 성벽을 축조하여 방어력을 강화한 전형적인 방어용 산성이다. 이 안에 왕궁을 비롯한 중요 시설들을 배치하였다. 공산성은 30년이 넘는 장기간의 체계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 축조양상, 왕궁지 및 왕궁 부속시설지 등이 발견되면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성체 총길이 2,660m(석성 1,925m, 토성 735m)인 공산성은 토성구간과 석성구간으로 구분된다. 대부분이 석성구간인데 처음에는 토성을 쌓았지만 나중에 여러 차례 고쳐 쌓으면서 석성으로 변화되었다.

토성은 동쪽 구역의 내·외성으로 구분된 범위에 위치한다. 이 중에서 외성 구간은 백제시대에 쌓았던 것으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공산성 대부분은 석성으로 남아 있고, 대부분 조선시대에 쌓은 것이지만, 부분적으로 백제시대에 쌓았던 석성의 흔적도 발견된다. 성곽의 현황을 통해 최초 백제시대에 토성으로 쌓았고 부분적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멸망 후 본격적으로 석축으로 쌓는 개축과 보축의 과정이 있었다.

왕궁지 유적은 공산성 내부에 솟아 있는 표고 110m 정도의 산봉우리 두 개 중에서 서쪽 산봉우리 정상의 면적 약 7,000㎡ 규모의 광장에 자리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이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기도 했다. 공산성 성곽을 오르면 금강을 보게 된다. 과거 금강은 매우 중요한 방어선이자 물자를 나르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조선 시대에는 제16대 왕 인조(仁祖, 1595~1649)가 이괄의 난에 쫓겨 이곳으로 몸을 피하기도 했던 곳이다.

당시 한 백성이 바친 떡을 지친 인조가 너무 맛있게 먹었다. 허기가 달래진 뒤에야 떡을 바친 백성을 찾았지만, 이미 사라진 이후였다.

신하들은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라고 답변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인조는 떡의 이름을 인절미라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공산성에는 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서려있다. 공주 공산성 방문 후 무령왕릉과 공주한옥마을, 공주산성 시장, 국립공주박물관 등을 들린다면 좋은 역사 여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공산성 역사 탐방 여행을 마치고 다음 여행지로 백제의 제26대 국왕 성왕(聖王, 재위: 523년~554년)의 원대한 꿈이 서려 있는 부여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제는 위례성(서울)에서 웅진(공주), 그리고 사비(부여)로 세 번이나 도읍을 옮겼다.

부여는 사비도성의 나성과 궁궐지, 사찰과 관청, 도로, 시가지 등 모든 것이 정연하게 정비된 성왕의 원대한 꿈이 담긴 계획도시였다.

성왕은 사비 천도를 통해 넓은 세계와 교류하며 국제도시로서 강성한 백제를 원했다. 북쪽으로는 백마강을 끼고 부소산성과 나성을 쌓아 외적의 침략에 대비했으며, 도시를 굽이쳐 흐르는 백마강을 통해 고구려와 신라, 나아가 일본과 중국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1993년 12월 능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를 살펴보면 당시 우리나라에는 살지 않았던 코끼리나 원숭이, 악어 등 낯선 동물들이 묘사된 걸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백제가 외부 세계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이런 동물들을 알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비의 왕궁터는 오랫동안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불과 40여 년 전인 1982년에 이르러, 부소산성 바로 아래에 있는 넓은 공터(현 관북리 유적지)에서 대형 전각 건물터와 건축 석재, 주춧돌, 도로, 상수도 등을 포함한 왕궁과 관련된 다양한 유구들이 발견되면서 사비시대의 왕궁터임이 비로소 확인되었다.

이후 2001~2008년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현재 백제의 왕궁의 구조 대부분이 확인된 상태다. 지금까지도 관북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다. 사비의 마지막 왕성과 왕궁터인 관북리 유적 뒤편에는 사비도성의 배후 산성인 부소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북쪽으로 백마강을 끼고 조성된 부소산성은 평상시에는 왕궁의 후원으로 사용되다가, 비상시에는 외적의 침입을 대비할 수 있는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산성 안에는 의자왕의 삼천궁녀들이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落花岩)과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자그마한 사찰 고란사(皐蘭寺), 그리고 아름다운 숲길을 따라 영일루迎日樓), 사비루(泗泚樓) 등 왕과 귀족들이 사용하던 정자가 곳곳에 마련돼 있다.

특히 이곳은 가을과 겨울에는 산성 전체가 단풍과 설경으로 물들어 가을과 겨울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제격인 장소다.

부소산성은 도심과 거리가 멀지 않고 해발고도가 높지 않아 누구나 편하게 산책하듯 오를 수 있다. 나지막한 숲길을 오르다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낙화암과 백화정(百花亭)이 나타난다.

백제의 마지막 순간, 자진해서 강물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는 사비의 여성들의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까. 절벽 위에 우뚝 솟은 백화정에서 내려다본 백마강의 전경이 왠지 모르게 아련하게 느껴진다.

절벽 아래 커다란 바위에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의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낙화암 아래에는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찰인 고란사가 자리 잡고 있다. 고란사 뒤뜰에는 '젊어지는 샘물'이 있어 많은 여행자들이 찾기도 한다.

더불어, 바로 옆 선착장에서 백마강 황포돛배를 타면, 부소산성과 낙화암의 모습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게다가 산길을 다시 오르지 않고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입구 쪽 구드레 선착장으로 되돌아갈 수 있어 편하다.

다음 역사 탐방 여행 코스는 공주, 부여, 경주와 함께 한국의 '4대 고도(古都)'이며 공주·부여에 이은 백제의 숨결이 살아있는 '백제고도(古都百濟)' 전라북도 익산이다.

익산은 동아시아 최대 사찰과 석탑이었던 미륵사(彌勒寺) 터와 미륵사지 석탑(益山 彌勒寺址 石塔), 왕궁리 유적(益山 王宮里 遺蹟)이 있는 왕도 익산의 위엄을 보여주는 곳으로 익산이 경주, 공주, 부여와 어깨를 겨루는 '4대 고도'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네 곳은 지난 2004년 한국의 '4대 고도'로 지정됐다.

익산은 왕궁(왕궁리 유적), 사찰(미륵사지, 제석사지), 산성(미륵산성, 익산토성), 왕릉(무왕릉) 등 고대 왕국이 갖춰야 할 4가지를 모두 가진 2천 년 고도다. 또 익산은 공주, 부여와 함께 백제 후기의 왕도였다.

익산은 2천 년 전 시간의 문을 여는 열쇠를 간직한 장소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고백도시'를 자처하고 있다.

이는 고도 백제(古都百濟)를 줄인 말인 동시에 '가자! 백제', 'GO 100(번)'을 의미한다. '사랑, 진심을 고백하는 익산'이라는 뜻도 있다.

역사 탐방 여행 2일째인 8일 아침 일찍 찾은 익산은 품격 높은 박물관, 정성스럽게 가꾼 유적지 만큼 데이트하거나 사랑을 고백하기 좋은 장소로 인파가 붐비지 않고 고즈넉해서 좋았다. 이와 함께 미륵산에 포근히 안겨 있는 차라리 힐링 공간이 되었다.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공간은 다툼과 미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문화재, 예술 작품, 역사 등 얘깃거리가 널려 있어 대화의 문이 끝없이 열린다. 익산에 가보자. 달려가 무왕의 숨결을 느껴보자.

백제의 무왕(武王, ?~641)은 어려운 시기에 왕 노릇을 하면서 많은 업적을 이룩했고, 한편으로는 갖가지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무왕은 백제 30대 왕으로 41년 동안 재위 했지만, 아들 의자왕 시기에 이르자 애써 지켜 내던 백제는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그는 백제 마지막 시기에 꺼져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그런 탓에 백제의 왕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 당시 백제는 한강 언저리에 있던 도성에서 남쪽으로 쫓겨나 웅진과 사비성에 도읍지를 정해 새로운 각오로 나라를 일으키려 했지만 연달아 고구려와 신라의 압박을 받았다.

그리하여 영역을 야금야금 침식당해 동쪽으로는 청주 등지를 신라에게 내주었고, 북쪽으로는 한강 아래에서 훨씬 내려와 금강 언저리까지 밀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대성팔족(大姓八族)'이라 일컫는 귀족들은 정치권력을 나누어 쥐고 나약한 임금들을 쥐고 흔들었다.

무왕의 할아버지 혜왕과 아버지 법왕은 즉위한 뒤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웅진과 사비성에서 웅크리고 있던 백제는 옛 영광을 돌이키려고 먼 수나라에 사람을 자주 보내 고구려를 정벌해 달라고 요청했다.

백제의 꼬드김에 솔깃한 수나라가 고구려 정벌에 나섰지만 거듭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고구려에 대한 백제의 복수심은 공염불로 끝나고 말았다.

법왕은 꺼져 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힘을 쏟았다. 살생을 금지하면서 민가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게 하고 고기잡이와 사냥 도구도 불태우게 했다.

이렇게 자비를 베풀어 민심을 모으려고 했지만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백제 중흥의 짐은 고스란히 무왕에게 지워졌다.

익산에서의 역사 탐방 여행은 무왕의 '백제 부활' 꿈이 서린 ‘왕궁리 유적’에서부터 시작했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왕실이 수도 사비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만든 별궁 유적으로 전북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한다. 미륵사지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로 5㎞쯤 떨어진 왕궁리에는 또 하나의 큰 백제 유적지인 왕궁리 터가 있다. 백제 무왕이 왕궁을 지어 살았던 곳이다.

그의 사후에는 사찰로 운영됐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은 40여 년 재위하며 백제의 부활을 꿈꿨다.

그 부활은 그가 태어나 자랐던 익산을 무대로 펼쳐진다. 현재의 서울을 500년 가까이 도읍으로 삼았던 백제는 공주를 거쳐 부여로 천도했다가 무왕 때 익산에 왕궁을 지은 것으로 최근 여러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용화산에서 시작하는 능선의 말단부에 형성된 낮은 구릉 위에 만들어진 왕궁리 유적은 높은 곳은 깎아 내고, 낮은 곳은 성토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실시하여 왕궁이 들어설 공간을 마련하였다.

담장이 들어설 지점은 바깥쪽을 경사지게 깎아내서 왕궁 내부가 담장 바깥보다 3-4m 이상 높게 조성되었다.

이와 같은 공간 조성은 중앙부를 높게 만들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높은 대지 위에 만들어진 건물이 궁장 밖에서 보면 더욱 장엄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왕궁리 유적은 1976년 이후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그 전모가 확인되었다. 백제시대 왕궁관련 시설, 금과 유리 등을 생산하는 공방시설, 사찰로 구성되어 있다. 왕궁관련 시설은 장방형의 석축 궁장을 비롯하여 동서석축, 총 33기의 건물지이다.

특히 정전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가 발견되어 백제 왕궁 구조 및 공간구획의 원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 건물지는 부여의 관북리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왕궁은 뒤에 그 기능이 사찰로 바뀌었는데, 사찰로 기능이 바뀌는 시기에 대해선 백제 말기(7세기 중엽)~통일신라 초기(7세기 후엽)라는 이견이 존재한다. 현재 남아있는 오층석탑이 이를 보여준다.

왕궁의 북측 부분에서는 정원(庭園)과 관련된 시설이 발견되었다. 정원은 물을 가두어두는 연못 형태가 아니라 기암괴석과 장대석, 강자갈을 이용하여 주변의 자연경관을 축소해 만들고 물이 흐르게 한 형태이다.

정원에 물을 끌어오기 위한 저수조, 물을 흘려 보내면서 완상하는 중심시설, 수조의 수량 조절을 위한 암거배수시설, 정원에서 나온 물을 모으는 집수시설, 출입시설과 정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정원 북쪽의 후원에서는 정원으로 공급하는 물을 집수하기 위한 U자형의 환수구와 곡수로가 발견되었다.

왕궁리 유적에서 사비시대의 왕궁 정원이 발견됨으로써 중국-백제-일본으로 이어지는 정원문화의 교류양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궁리 정원에서 발견된 기암괴석 중에는 태호석, 혹은 어린석이라고 불리는 중국산 수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당시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준다.

백제의 정원이 일본의 정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역사 기록에 나와 있지만 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왕궁리 유적에서 사비시대의 왕궁 정원이 발견됨으로써 중국-백제-일본으로 이어지는 정원문화의 교류양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궁리 정원에서 발견된 기암괴석 중에는 태호석, 혹은 어린석이라고 불리는 중국산 수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당시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준다.

왕궁리 유적에서는 금제품, 은제품, 유리제품 및 그 원료, 도가니, 슬래그, 송풍관 등 다양한 종류의 생산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왕성 내부에 왕실 직속의 수공업 공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방지 남쪽에서는 대형의 화장실 3기가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발견되었다. 1호 대형화장실의 규모는 길이 10.8m, 폭 1.8m, 깊이 3.4m이다.

이 대형화장실 유구는 왕성 내에 거주하였던 관리나 궁인들이 사용한 것이다. 고대의 대형 화장실은 한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이며 이웃한 일본의 화장실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아무튼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遷都)한 것인지, 익산에 별도(別都)를 만든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익산이 왕도인 것만은 분명해졌다.

격동기였던 7세기 한반도에서 무왕은 익산을 거점으로 백제 부흥의 야심을 펼쳤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본다.

현재 왕궁리 터에는 절제된 조형미로 유명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 국보 289호)을 제외하고는 왕궁 건물과 시설이 모두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다. 거대한 왕궁터를 오층석탑이 홀로 지키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왕궁터를 향해 걸으면 늙은 벚나무 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5층 석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실감케 하는 또 하나의 장면이다. 왕궁리 터에는 오층석탑을 찬미한 시들이 적힌 표지판이 서 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익산 왕궁리 유적에 있는 오층석탑으로 1965년부터 1966년에 보수를 위한 해체와 복원을 시행하였고 이때 흙 속에 묻혀 있던 돌로 만든 기단부가 발견되었다.

1층 옥개석 상면과 기단부 심초석 상면에 마련된 사리공에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를 수습하였다.

창건에 대한 문헌 기록이 없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추정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의 건립 연대는 백제 시대에서 통일신라, 고려 시대 초까지 논란이 다양하다.

1989년부터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본격적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백제 시대에 경영되었던 궁성이 폐기되자 궁성 터에 탑·금당·강당을 남북 일직선으로 배치한 백제의 전형적인 1탑 1금당식 사찰을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본래 목탑이었던 것이 현재의 석탑으로 바뀌었고 백제 멸망 이후에도 법등을 계속 이어 갔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44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월 1일 국보 제289호로 승격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보로 재지정되었다.

1989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왕궁리 유적 조사 결과 백제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외곽 담장과 내부 구조가 확인됐다.

왕궁의 남측 절반은 의례, 정무를 위한 공간이었고 북측 절반은 휴식 공간인 정원과 후원으로 배치됐음이 드러났다. 북측 공간에는 당시로는 최고 귀중품이었던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이 있었다. 또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형 화장실 유적이 있다.

이 화장실 유적은 상당히 과학적으로 설계돼 있었다. 화장실을 경사지에 만들고, 경사지 위에서 아래쪽으로 물이 흘러내리게 해 오물이 물을 따라 자연스럽게 강으로 흘러가게 했다. 일종의 수세식이다.

또 화장실 구덩이를 3m 이상으로 깊이 파고, 구덩이에 고인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로는 구덩이의 높은 곳에 위치시켰다. 현대 정화조 시설과 유사한 원리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근대에 만든 파리의 하수도를 과학적 구조라며 관광지로 만들어 자랑한다. 한국의 고대 정화조는 파리 하수도가 명함을 내밀 수조차 없을 정도로 훨씬 오래된 지혜임이 틀림없다.

왕궁리 유적 역사 탐방 여행을 마치고 발걸음을 옮긴 곳은 동양 최대의 절터로 평가받는 익산 미륵사지다.

익산 미륵사지는 사찰 건물은 오래전에 모두 사라지고 없었지만 푸른 잔디 위에 서 있는 몇 개의 석조 유물이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곳에 한국 문화재 보수의 새 장을 연 미륵사지 서쪽 석탑(이하 '미륵사지 석탑')이 있었다. 그리고 이 석탑 오른쪽에 실패한 문화재 복원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미륵사지 동쪽 석탑(이하 '동탑')이 있다.

미륵사지 석탑과 동탑은 처음에 모양과 높이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쌍둥이 탑이다. 그러나 복원 및 보수의 개념과 방법이 달랐기 때문에, 복원과 보수가 끝난 지금 두 탑은 전혀 다른 모습과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불린다. 그만큼 석탑이 많다. 석탑 안에는 사리장엄구, 불경 등의 귀한 문화유산이 간직돼 있다. 석탑에서 나온 유물은 고대의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될 때가 많다.

이런 한국 석탑들의 시원이 바로 미륵사지 석탑이다. 그 전에 한국의 탑은 목탑이었다. 실제로 미륵사지 석탑 바로 옆에는 이 석탑보다 더 큰 목탑이 있었다. 목탑은 유실됐고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그래서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의 양식,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하는 이행 과정을 보여준다.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던 익산 미륵사는 백제 무왕(武王, 재위 600-641) 대에 지어져 조선 시대인 1600년대까지 유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터의 규모가 확인된 사찰 중에서는 백제 최대, 나아가 동아시아 최대 사찰이었다.

미륵사지의 상징처럼 우뚝 솟은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자, 제일 큰 석탑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장장 20년에 걸친 보수 작업의 대장정을 마쳤다. 단일 문화재로는 수리 기간이 가장 길다. 그만큼 문화재 관리 당국과 학계는 미륵사지 석탑 보수에 공을 들였다.

석탑이 수리를 끝내고 준공된 뒤 미륵사지를 찾는 관람객은 이전의 연간 수만 명 수준에서 10만 명 이상으로 훌쩍 늘었다. 국민의 높은 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미륵사는 전형적인 1탑 1금당의 백제식 가람배치와 달리 세 개의 탑과 금당 등으로 구성된 3탑 3금당의 독특한 배치형식이다. 이 미륵사지 석탑은 세 개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이다.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 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다.

창건 당시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으며, 17~18세기 이전 1층 둘레에 석축이 보강되고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운 상태로 전해졌다.

남아있던 6층까지의 높이는 약 14.2m이고 상·하 이층으로 구성된 기단의 전체 폭은 약 12.5m이다. 1층은 각 면이 3칸으로 구성되고 가운데 칸에는 문을 내달아 계단을 통해 사방으로 통하게 하였다.

기둥석은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민흘림기법과 양 끝 모서리를 약간 높인 귀솟음기법이 반영되어 있다. 기둥석 하부에는 목조건물에서처럼 별도의 초석이 있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상ㆍ하 인방석(引枋石)과 기둥 상부에 평방석(平枋石), 포벽석(包壁石) 등이 구성되었다.

옥개부(屋蓋部)는 목조건물의 지붕처럼 모서리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고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는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한편 석탑의 1층 내부에는 '十' 자형 공간이 조성되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출입이 가능하며, 탑의 중심에는 여러 개의 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기둥(심주)이 4층까지 연속된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며, 2009년 1층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의 기록을 통해 639년이라는 석탑의 건립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이듬해 해체수리가 결정되었고 2001년 해체조사에 착수하여 2017년 조립공정이 완료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고대의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충실하게 잘 보여준다. 또한 고대건축의 실제 사례로써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우리나라 불탑건축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재이다.

문화재위원회가 1999년 구조 불안정을 이유로 해체, 수리를 결정했을 때 미륵사지 석탑은 콘크리트 덩어리에 방불했다.

일제가 1915년 이 석탑의 무너져 내린 부분을 수리하면서 콘크리트를 덕지덕지 발랐기 때문이다. 해체 과정에서 제거한 콘크리트 양은 185t에 이른다. 그런데 이렇게 정성 들여 복구한 미륵사지 석탑은 보수하다가 만 듯한 느낌을 준다.

석탑 중 유실된 부분을 보수하지 않고, 없는 채로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문화재 관리 당국과 학계는 미륵사지 석탑의 원형을 확인하지 못하자, 남아있는 부분 혹은 기록 등으로 확인된 부분만 복원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문화재의 원형이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형태를 추정해서 복원하거나 수리한 경우가 허다했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는 추정에 의하지 않고,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현대의 온갖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루어졌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원형대로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은 문화재로서 진정성, 역사성을 확보했다. 한국의 석조 문화재 복원 기술을 세계 수준으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동탑은 1992년부터 1993년까지 2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복원됐다. 당시 동탑은 본래의 형체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져 내리고, 잔해조차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당국과 학계는 나름의 연구를 근거로, 탑의 높이와 모양을 추정했다. 그리고 추정을 근거로 동탑을 9층 탑으로 복원했다. 원래 석탑을 구성했던 돌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계로 돌을 새로 깎아 탑을 쌓았다.

복원된 동탑은 원형을 회복한 문화재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물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 '졸속 복원' 논란이 제기됐고, 동탑은 '성형미인', '죽은 탑'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다.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와 동탑의 복원은 문화재 수리와 보존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미륵사지 석탑과 동탑은 국내 문화재 보존 역사와 가치관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오래 남을 것이다. 그러나 동탑을 외면할 게 아니라 변화하는 우리 인식의 일부이자 산물로 보듬는 애정을 갖는 게 옳을 듯싶다.

한편 해체 작업이 막바지에 달했던 2009년 1월 미륵사지 석탑에서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또 가로 15.5㎝, 세로 10.5㎝의 금판에 글자를 새긴 '금제사리봉영기'가 출토됐다.

여기에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시주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이로써 미륵사와 석탑의 조성 주체와 연대가 확인됐다.

당시 해체 작업에 참여했던 문화재 관계자는 "탑이 개보수되는 과정에서 사리가 옮겨지거나 분할되는 경우가 많고, 사리장엄과 봉영기가 원형 그대로 출토되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며 "1천 400년 전에 묻었던 타임캡슐이 열린 셈"이라고 설명했었다.

사리장엄구는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됐고, 사리는 미륵사지 석탑에 재봉안됐다.

지난 2019년 2월 26일 미륵사지 바로 옆에는 국립박물관으로는 전북에서 두 번째인 국립익산박물관이 개관했다. 미륵사지의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건물의 높이를 낮춰 박물관과 미륵사지 유적이 조화를 이루게 했다.

익산박물관에 들어서면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 중 사리내호가 1호 전시물로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사리내호는 높이 5.9cm, 지름 2.6cm의 금 세공품이다. 사리를 담은 작은 유리병을 다시 넣는 소형 금속 항아리다.

90% 이상의 순도로, 황금빛을 발하는 사리내호의 정교한 아름다움 앞에서 관람객은 숨이 멎을 듯한 황홀감에 빠진다. 찬란했던 백제 예술혼의 세계로 인도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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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섭 기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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