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일 시인, 다섯 번째 시집 <우주의 벌레 구멍> 출간…우주의 심연에서 마음의 언어를 길어 올리다

  • 등록 2025.09.10 14: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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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물결로 가 닿는 우주의 심연…철학과 과학, 그리고 시의 만남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한국 현대시단에서 묵직한 울림과 날카로운 사유로 독자들에게 다가온 강서일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우주의 벌레 구멍>(한국문연 刊)을 출간했다.

전작 <고양이 액체설>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이번 시집은, '마음의 언어'라는 본질적 화두를 우주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로 풀어내며, 인간 내면의 마음을 물과 구름, 파도 같은 이미지로 풀어내며 우주적 차원의 상상력으로 확장한 시편들로 독자들을 ‘내면의 벌레 구멍’으로 초대하고 있다.

강서일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시간과 공간, 공기까지 시 속에 묻어 두었다"라며 "살펴보니, 시편마다 그때의 시간과 공간, 함께 머물렀던 공기까지 그대로 묻어 있다. 지금의 생각이나 감각과는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그때 그 순간의 느낌을 존중하기로 한다"고 고백한다.

이는 곧 지나간 시간을 붙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순간의 감응이 여전히 현재 속에서 살아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로 그의 시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순간의 감각을 영원의 언어로 보존하려는 작업임을 드러낸다.

시집은 총 4부로, 일상과 우주의 경계를 넘나 드는 60여 편의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에스프레소 한 잔>에서는 '구름은 흩어지고', '비행기 소리', '마네킹의 일기' 등 일상 속 단상을 시적으로 끌어올린 작품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제2부 <지중해 푸른 눈동자>에서는 '봄을 보는 눈사람', '인공지능', '고양이의 감정' 등 동서양 문명과 현대 과학의 상상력이 교차한다.

또 제3부 <지붕 위로 올라간 현자>에서는 'K의 여행', '노자의 소', '구름 생각' 등 동양 사상과 여행 체험이 결합하고 있으며, 제4부 <숭어는 맨드라미를 모른다>에서는 '영겁회귀', '책의 비밀', '영혼의 산파' 등이 우주적 비유와 존재론적 질문을 담고 있다.

제목 그대로, 이 시집은 시인이 '우주의 벌레 구멍'이라는 은유적 통로를 통해 미시와 거시, 일상과 철학, 현실과 초월을 자유로이 오간 결과물이다.

이번 시집에는 '마네킹의 일기', '영겁회귀', '비행기 소리', '봄을 보는 눈사람' 등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수록돼 있다.

'마네킹의 일기'는 생명 없는 존재가 인간의 고통을 목격하며 던지는 질문을 통해, 인간 실존의 고단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부각하며, 목적만을 위해 태어난 존재, 즉 생명 없는 마네킹을 통해 인간의 덧없음과 고통의 환희를 역설한다.

생명이 없기에 고통도 없는 마네킹의 시선은 오히려 인간 존재의 진정성을 비추는 차가운 거울이 된다.

'영겁회귀'는 "숭어는 맨드라미를 모른다"라는 반복적 어구로 존재 간의 단절과 연결을 동시에 상징하며, 우주의 질서를 은유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서로를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망을 이루고, 바람과 파도, 사랑의 순간들이 얽히며 우주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는 니체의 영겁회귀 사상과 맞닿아 있으며, 인간 존재가 미시와 거시의 우주를 동시에 살아내고 있음을 환기한다.

'비행기 소리'에서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의 부재와 흔적을 통해 인간 기억의 허망함을 담담히 드러내고 있으며, '봄을 보는 눈사람'은 계절 앞에서 무너져가는 눈사람의 자아를 통해 소멸과 환희, 삶과 죽음의 양가성을 보여준다.

따뜻한 겨울을 견디다 결국 봄의 도래와 함께 소멸할 운명에 놓인 눈사람은, 덧없음 속에서도 가장 뜨거운 순간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전한다.

이는 강서일 시인이 일관되게 탐구해온 '마음의 역사' - 변화와 소멸 속에서도 흐르는 어떤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들 시편은 모두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탐구하려는 시인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김효숙 문학평론가는 <강서일의 시세계 - 활성화한 '물'이라 부르면>을 통해 강서일 시인의 이번 시집 <우주의 벌레 구멍>의 특징을 '흐름의 시학'이라 정의하며, "강서일 시인의 세계관은 더욱 깊어지고, 마음에 관한 사유도 한량없이 넓어지고 있다"고 평했다.

김 평론가는 특히 시인이 '마음'을 물처럼, 구름처럼 유동하는 실체로 형상화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데카르트적 이분법이나 서구의 인지과학이 뇌 중심으로 마음을 이해하려 했다면, 강서일은 동양적 사유에 바탕해 마음을 가슴과 시간, 그리고 우주와 연결된 흐름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김 문학평론가는 "강서일의 시는 보이는 실체보다 보이지 않는 진실에 집중한다"며 "'물', '구름', '마음'의 표상은 곧 생명성과 리듬의 은유이며, 이는 노장사상과 불교적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평했다.

특히 "<우주의 벌레 구멍>은 거대 우주를 묘사하기보다, 개인적 마음의 미시적 우주를 통해 보편적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했다.

실제로 그의 시에서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꽃이자, 시공간이 겹쳐진 구름이며, 부단히 움직이는 에너지다. 이는 불교의 무상 사상, 노자·장자의 자연관과도 맞닿아 있으며, 동시에 현대 과학의 '확장된 마음' 개념을 문학적으로 풀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김효숙 문학평론가는 "강서일의 시는 덜어냄을 통해 깊이를 확보하고, 표면적 이미지 속에 철학적 사유를 감춰두는 독특한 미학을 실현한다"고 강조했다.

시집 제목인 <우주의 벌레 구멍>은 물리학적 개념인 웜홀(Wormhole)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강서일의 시에서 이 '벌레 구멍'은 단순히 거대 우주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라는 소우주, 일상과 내면의 틈새에서 발견되는 무한의 통로에 가깝다.

김효숙 문학평론가는 끝으로 "나라는 자아가 없다면 우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우주 개념을 강조하며, 강서일 시의 우주가 미시적 경험과 거시적 질서를 동시에 품고 있음을 지적했다. 다시 말해, 그의 시에서 우주는 단지 별과 은하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 눈물, 사랑, 고통의 순간들까지도 포함하는 유기적 네트워크다.


강서일 시인은 고려대 교육대학원 영어과를 졸업하고, 1991년 <자유문학>과 <문학과의식>에서 각각 시와 평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쓸쓸한 칼국수>, <사막을 추억함>, <카뮈의 헌사>, <고양이 액체설>, 시선집 <일주일의 연애>, 그리고 이번 신작 <우주의 벌레 구멍>이 있다. 또한 번역서로 <첫사랑 피카소>, <비틀즈 시집>, <대화의 신> 등을 펴내며 시와 번역을 아우르는 활동을 이어왔다.

강서일 시인은 자유문학상, 한국시문학상, 미당시맥상 등을 수상했으며, (사)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여주대학교 겸임교수로도 활동하며 시단의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우주의 벌레 구멍>은 결국 인간 존재가 직면한 덧없음과 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과 영원의 순간을 동시에 응시한다. 구름처럼 흘러가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삶의 파동 속에서, 시인은 시라는 언어로 우주의 작은 문을 열어젖힌다. 그 문은 독자들로 하여금 각자의 내면에서 또 하나의 우주를 발견하게 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시와 철학, 과학과 동양적 사유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탄생한 깊고도 넓은 '마음의 지도'라 할 수 있다.

강서일 시인의 <우주의 벌레 구멍>은 단순히 한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 아니라, 동서양 사유와 일상적 이미지가 교차하는 '마음의 지도'다. 그의 시는 인간 존재가 지닌 고통과 환희, 단절과 연결을 '벌레 구멍'이라는 통로로 관통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우주를 탐색하게 한다.

저녁노을이 사라져도 마음의 언어는 남는다. 강서일 시인의 이번 시집은, 바로 그 언어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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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섭 기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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