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한국의 전통시인 시조 100편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프랑스에서 첫 출간됐다. 고시조의 품격과 현대시조의 생동감이 한 권에 담긴 이번 선집은, 한·불 시인협회의 교류와 협력에서 탄생한 결실이다.
번역의 세심함과 시적 감수성을 함께 담아낸 이 책은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향한 또 하나의 발걸음이자, 전통시의 세계적 공감 가능성을 보여준다. [편집자주]
한국 전통시 '시조' 100편을 프랑스어로 엮은 선집 <한국 전통시 선집(시조) - 100 sijo>이 프랑스에서 발간됐다.
이번 선집은 (사)세계전통시인협회 한국본부(이사장 최순향)와 프랑스시인협회(회장 장-샤를 도르즈, Jean-Charles Dorge) 간의 긴밀한 문화교류와 협력의 결과물로, 한국 전통시의 형식미와 문학적 가치를 프랑스어권 독자들에게 소개하려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이번 책은 고시조 50편과 현대시조 50편을 엄선해 수록했다. 김소월·윤선도·황진이 같은 고전 작가들의 작품부터, 김민정·유자효·최순향 등 현대 시인의 작품까지 폭넓게 담겼다.
현대시조 부문에는 김민정 시인의 '유월을 풀다' 등이 실렸다. 이 작품은 초여름의 빛과 그림자, 그 속에 깃든 내밀한 사색을 담고 있다.
Au sursaut de juin
(유월을 풀다)
비에 젖자 하나둘씩 잎새들이 말을 건다
어제의 되약별도 나쁜 건 아니었어
때로는 복이 탔지만 그도 참아내야지
Une à une à la pluie les feuilles se mettent à parler
Le coup de soleil d'hier n'était pas plus mauvais
Parce que parfois, il fait soif mais il faut le supporter
언제라도 절정이다 이 아침 나팔꽃은
나 또한 마찬가지 언제나 절정이다
이렇게 푸름이 내게 사무치게 안긴다면
Encore dans leur gloire ce matin, les liserons
Et moi de même à moi pareil je monte au ciel
Quand ce bleu tout autour m'embrasse de toutes parts vivant
- 김민정 시인의 '유월을 풀다' 전문
프랑스어 번역본에서는 유월을 'juin'(6월)로 옮기되, 계절감과 정서적 결을 살리기 위해 'la lumière tendre de juin'(유월의 부드러운 빛)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로써 독자들은 단순한 시간표시가 아니라, 한국적 여름의 촉감과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최순향 시인의 사설시조 'La corde se romprait-elle? (긴히 단 그스리잇가#)'는 인간 관계의 긴장과 인내, 그리고 그 끈이 끊어질까 두려운 심리를 긴 문장 속에 펼쳐낸다.
'끈'은 연인과 가족, 혹은 사회적 신뢰를 상징하며, 그 팽팽함이 삶의 무게와 섬세하게 맞물린다.
La corde se romprait-elle?
(긴힛단 그츠리잇가#)
saseol-sijo (사설시조)
까만 밤하늘 유성이 긋고 가는 슬프게 아름다운 나라
풀잎과 이슬이 바람과 구름이 풀잎과 내가 이슬과 내가 바람과
또 내가 나와 구름이 그리고 그대와 내가, 어느 찰나 또는 아주
먼 동안 헤어진다 치자. 이합은 구원에서 와 찰나에 머물듯이
그건 인연의 날갯짓, 이슬이 골안개 되어 구천에서 바람 만난
구름이다가 풀잎으로 되돌아오듯 도솔천에 함께 하는 어울림이
아름답지 아니한가. 허허청청 나비의 날갯짓, 눈짓은 눈짓끼리
그렇게 이어지네 이어진다네. 보라 저 이끼풀이 목말라 하거든 나
이렇게 노래 부르리
긴힛단 그츠리잇가 긴힛단 그츠리잇가## 아, 님하
Un pays si tristement beau où les météores traversent le ciel nocturne
Supposons que se séparent le brin d'herbe et la rosée, et le vent et
les nuages, et que le brin d'herbe et la rosée, et le vent et le nuage,
et toi-même avec moi nous séparions, un instant ou pour un long
moment. S'unir et se séparer, ça vient de vieille rancune et ça dure
un instant, c'est un battement d'ailes, et comme la rosée, après avoir
pris forme de brouillards croisés dans les neuf cieux, revient sur les
feuilles d'herbe, cette harmonie en dosolcheon n'est-elle pas belle?
Le battement d'ailes de papillons immenses et bleus, le regard entre
les regards, continue ainsi, continue, vois-tu? Ecoute bien, quand la
mousse dira avoir soif, je chanterai ainsi :
La corde se romprait-elle, la corde se romprait-elle, oh, mon amour
- 최순향 시인의 사설시조 'La corde se romprait-elle? (긴힛단 그츠리잇가#) ' 전문
최순향 시인의 사설시조 '긴힛단 그츠리잇가#'는 전통 시조 틀에 자연과 관계의 순환을 겹쳐 놓는다. 풀잎, 이슬, 바람, 구름이 스쳐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은 사람 사이의 만남과 이별을 은유한다.
반복되는 '이어지네 이어진다네'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인연의 질감을 드러내고, 종장의 "긴힛단 그츠리잇가"는 관계의 영속성과 단절 가능성 사이의 긴장을 묻는다.
자연의 흐름과 인간 감정이 한 줄기 리듬으로 얽혀, 서정 속에 시간과 인연에 대한 사유를 남기고 있다.
이번 번역은 프랑스 보르도 대학교(Université de Bordeaux)의 손미혜(SON Mihae) 교수와 장-피에르 주비아트(Jean-Pierre Zubiate)가 맡아 원문의 함축미와 운율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어 프랑스어로 옮겼다.
표지와 편집은 프랑스 측 출판사 및 관련 단체의 협력으로 이루어졌으며, 표지 그림은 강영석 작가의 '님의 침묵'이 사용되었다.
한·불 시단의 우호적 협력에서 출발
이번 출판은 2023년 3월 21일 파리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한불 친선의 밤' 행사에서 양국 최대 규모의 시인단체들 간 상호 협력 협약(MOU)이 체결된 이후 이어진 교류의 귀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당시 행사에는 한국에서 온 24명의 시인 대표단을 포함해 약 100여 명의 시인들이 참석했고, 이후 양국에서는 상호 번역 작업과 시 발표가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장-샤를 도르즈 프랑스시인협회 회장은 "한국의 시조 100선집이 프랑스에서 발간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한국 시조가 프랑스 독자들에게 주는 울림, 즉 기쁨과 감동은 단순히 '이국적'이라는 호기심을 넘어 보편적 정서와 맞닿아 있다"고 소회를 전했다.
또한 프랑스 고전시 소개서가 한국에서 발간되는 등 상호 문화교류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전통의 교류가 평화로 가는 작은 발걸음"
최순향 (사)세계전통시인협회 한국본부 이사장은 본 선집의 기획 배경과 의의를 설명하며, "첫째는 한국의 전통시인 시조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것, 둘째는 다른 나라 전통시를 우리도 이해하는 것"이라며, "또한 전통시 교류가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고 궁극적으로 평화와 공존에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최순향 이사장은 선집 발간 과정에 대해 "고시조는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현대시조는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 위주로 선별했다"며 선별의 어려움과 아쉬움을 토로하면서도 "한국 최고의 시조 작품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세계에 소개할 수 있어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프랑스와 한국 시인들은 이미 시 낭독회, 공동 번역 작업, 문학 교류전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선집 발간은 단순한 번역서가 아니라, 언어와 문화를 넘어선 '시의 우정'이 기록된 책이다.
번역과 선별의 고충, 그리고 기대
최 이사장은 그러면서 "현대시조 선별 과정이 특히 까다로웠다"고 전하며 "현존하는 시조시인의 작품 가운데에서 작품성을 기준으로 엄선해야 했고, 더 많은 작품을 소개하고 싶었으나 현실적 제약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시조와 현대시조를 한 권에 묶어 집중적으로 번역·출간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학계와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최 이사장은 또한 이번 작업에는 유자효 전 한국시인협회장의 특별한 노력이 있었다는 점도 소개됐다. 프랑스어권 작가·시인협회는 유자효 전 회장의 시조집 <청자 주병> 불역본 발간 작업도 병행하여 추진하고 있어, 향후 한국 시조의 프랑스어권 보급은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문화외교적 파급효과와 향후 과제

이 책의 발간을 주도한 조홍래 교수(한불문화교류센터 이사장)는 이번 출판이 양국 간 문화적 이해와 친선을 증진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 이사장은 "이번 발간을 계기로, 한국 시조가 프랑스어권 문단에서 보다 활발히 논의되길 바란다"며 "앞으로는 영어·스페인어·독일어 등 다른 언어권으로의 확장 번역도 추진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와 한국 간의 문화 교류는 단순한 문학 교류를 넘어 전통과 정체성에 대한 상호 인식을 넓히는 계기가 되고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언어권으로의 번역과 교류 확장이 기대된다는 것이다.
현지 출판과 번역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의 문화적 맥락 전달, 번역의 미묘한 뉘앙스 문제, 그리고 더 폭넓은 독자층 확보 등은 향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전문가들은 "시조의 고유한 형식미와 운율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작업"이라며 "번역가와 편집자의 섬세한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파리의 독립서점 리브르리 델라뤼(Librairie de la Rue) 대표 클레르 마르탱은 "한국 시조는 프랑스 시에서 드물게 만나는 '호흡의 여백'을 제공한다"며 "독자가 시를 읽고 난 뒤, 그 여백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넣게 만든다"고 평했다.
프랑스 문학평론가 피에르 바야르(Pierre Bayard)는 “시조의 정형성은 프랑스 시 전통의 '알렉상드랭'과 대화하듯 다가온다"며 "그러나 시조는 그 틀 안에서 놀랍도록 유연하고,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강렬하게 전달한다. 한국 시조는 프랑스 독자에게 '느림의 미학'을 새롭게 체험하게 한다"고 평했다.
한편 이번 프랑스판 시조 선집 출간은 한국 전통문학의 국제적 확산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례다. 고시조의 전통성과 현대시조의 창작성을 함께 담아낸 이 선집은, 프랑스어권 독자들에게 한국 문학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양국 문단 간의 지속적·상호적인 교류가 이어질 때, 시조는 더 많은 독자의 공감을 얻고 전통시의 세계화라는 과제를 한층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전통시 선집 - 100 sijo>의 출간은, 시조가 단순한 민족문학을 넘어 세계시의 한 갈래로 자리잡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독자가 시조의 정형미 속에서 한국 문학의 향기와 팽팽한 끈의 긴장을 느끼는 순간, 한국의 전통과 현대는 이미 국경을 건너 함께 숨 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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