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처럼 낮게, 사랑처럼 깊게… 서울시인협회 '2025 올해의 시인상'에 은월 김혜숙 시인

  • 등록 2025.12.23 22: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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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생명성과 일상의 성찰을 직설적 서정으로 길어 올린 시 세계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서울시인협회(회장 민윤기)가 주최한 2025년 송년회 및 시상식이 12월 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이날 행사에서 은월(銀月) 김혜숙 시인이 시집 <풀꽃의 기억>으로 '2025 올해의 시인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날 시상식에서는 '신인작품상' 수상자 4명도 함께 호명되며 공식 등단의 자리를 가졌다.

문학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뜻깊은 자리에는 <월간 시인> 발행인이자 서울시인협회 회장인 민윤기 시인을 비롯해 명예회장 이근배 시조시인, 전 회장 유자효 시인, 이향아 시인, 조명제 문학평론가, 송하진 전 전북도지사, 전 SBS 라디오본부 제작위원 박건삼 시인, 브레이크뉴스 문일석 회장 등 문단과 문화계 주요 인사, 협회 회원들이 대거 참석해 수상을 축하했다.






민윤기 발행인 "김혜숙 시인의 시는 삶의 높이를 낮추는 시"

이날 시상식에서 민윤기 <월간 시인> 발행인이자 서울시인협회 회장은 수상 축사를 통해 김혜숙 시인의 문학적 성취와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민윤기 회장은 "김혜숙 시인의 시는 화려한 수사나 현학적 장치를 앞세우지 않는다"며 "오히려 삶의 높이를 낮추고, 시의 시선을 낮추어 독자에게 다가오는 시"라고 말했다.

민 회장은 이어 "<풀꽃의 기억>은 자연을 노래한 시집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생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기록"이라며 "꽃은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생명이고, 김혜숙 시인의 시 역시 그러하다"고 덧붙였다.

또한 민 회장은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견디며 꾸준히 시를 써온 태도 자체가 이미 하나의 문학"이라며 "이번 '올해의 시인상'은 단지 한 권의 시집에 대한 상이 아니라, 흔들림 없이 걸어온 시인의 시간에 바치는 헌사"라고 강조했다.

"풀꽃을 바라보듯, 시도 사람도 낮게 바라보려 했다"

김혜숙 시인은 수상소감에서 "이 상은 시를 잘 썼다는 상이라기보다, 시를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로 받아들이고 싶다"고 말하며 담담한 감회를 전했다.

김혜숙 시인은 "풀꽃은 늘 발밑에 있었지만, 한 번도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며 "저 역시 시 앞에서 늘 배우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이어 "생활에 치이고, 마음이 메마를 때도 있었지만 시만큼은 거짓 없이 써왔다"며 "이 상은 앞으로도 자연처럼, 사람처럼, 조용히 그러나 끝까지 시를 쓰라는 당부로 새기겠다"고 강조했다.

김 시인은 그러면서 "일흔을 향해 가는 나이에 받는 상이라 더욱 무겁다"며 "이제는 더 많이 비우고, 더 많이 사랑하는 시를 쓰겠다"고 덧붙였다.


생활인의 시, 그러나 가볍지 않은 통찰

은월 김혜숙 시인은 지난 10월 네 번째 시집 <풀꽃의 기억>(인문학사)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시인이 오랜 시간 천착해온 자연 친화적 서정과 일상적 성찰이 한층 원숙한 언어로 정제된 결과물로 평가받는다.

문학평론가 나호열은 평설에서 "김혜숙 시인의 시가 현학적이지 않은 이유는 시인이 '보통 사람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라며 "그의 시에는 삶의 신고(辛苦)를 외면하지 않는 낮은 시선과 생활인의 진정성이 배어 있다"고 평했다.

실제로 시집에는 일상의 단상과 인생에 대한 자책,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가진 것을 자랑만 하고 나누지 못하는 친구를 향해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고 말하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그 말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순간을 시로 옮긴다.

그럼에도 난 살아가는 방법이 아직 서툰 것처럼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아픈 것은
지면에서 울리는 삶의 안간힘
이 나이에도 참아내는 인내를
깨우치지 못한 탓일 것

이러한 자기 성찰은 '지나고 보면 다 꽃 피는 때였다'는 문장으로 귀결되며, 독자에게 잔잔하지만 깊은 여운을 남긴다.

'꽃'은 장식이 아니라 생명이다

<풀꽃의 기억>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 역시 '꽃'이다. 그러나 김혜숙 시인의 꽃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나호열 평론가는 "시인이 꽃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꽃이 지닌 생명성과 생식의 힘을 강조한다"고 분석한다.

<풀꽃의 기억>은 '자연을 노래한 시집'이라는 단순한 분류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 시집에서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윤리의 형식이며, 풀꽃은 대상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의 은유다. 김혜숙의 시는 자연을 빌려 인간을 말하고, 인간을 통해 다시 생명의 본질을 되묻는다. 그것은 서정의 회귀가 아니라, 서정의 갱신에 가깝다.

<풀꽃의 기억>에서 꽃은 결코 장식적 이미지가 아니다. 꽃은 생식의 표상이며, 생명의 지속성 자체다. 나호열 평론가가 지적했듯, 김혜숙의 시가 꽃의 '아름다움'보다 '생명성'에 주목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때 생명성은 낭만적 찬미가 아니라 선악과 호불호 이전의 존재성을 의미한다.

꽃은 선악이나 호오의 판단을 초월한 존재이며, 그 자체로 완결된 생명이다. 김혜숙 시인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 역시 평가나 규정 이전에 존중받아야 할 생명임을 시적으로 환기한다.

'일흔 이후', 비움과 사랑의 미학


이번 시집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지점은 '나이 듦'에 대한 통찰이다. 특히 '일흔 이후' 연작은 삶의 후반부를 맞이한 시인의 인식이 응축된 작품으로 꼽힌다.

살아온 것이 다 내 욕심이었고
살아가는 것이 또 남은 민폐
일흔 이후는 남기지 말고
조금씩 비우고 홀가분하게
숲처럼 자연처럼 그림처럼

나호열 평론가는 마지막 연의 '이른 이후'를 조바심을 내려놓은 느림으로, '잊은 이후'를 서운함과 아쉬움의 해소로, '잃은 이후'를 집착이 사라진 공(空)의 세계로, '생 그 이후'를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자각하는 성찰로 읽어낸다.

더 나아가 김혜숙 시인은 신앙에 기반한 아가페적 사랑을 시적 지향점으로 삼는다.

당신도 이미 사랑으로 살고
누구도 사랑할 자격 있나니
하물며 네가 바라보는 잡풀도
나도 사랑으로 바라본 적 있었다

이 고백은 <풀꽃의 기억>이 결국 자연과 인간, 신앙과 삶을 하나의 사랑으로 묶어내는 시집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꾸준한 창작, 흔들림 없는 시의 길

은월 김혜숙 시인은 2013년 <서울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세 권의 시집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2017년 시전문지 <시인마을> 문학상, 2021년 국제문학시인대상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한국현대시인협회 사무차장과 서울시인협회 사무2처장을 역임하는 등 문단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생활인으로서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소명을 동시에 짊어진 채 걸어온 그의 시의 길은, 이번 '올해의 시인상'을 통해 다시 한 번 조용하지만 단단한 의미로 문단에 새겨졌다.

오늘날 한국 시단에서 서정시는 종종 낡은 형식으로 오해받는다. 그러나 <풀꽃의 기억>은 서정이 여전히 유효한 형식임을, 아니 오히려 지금 더 필요한 시적 태도임을 증명한다.

김혜숙의 시는 실험적이지 않지만, 진부하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형식이 아니라 새로운 태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풀꽃처럼 낮은 자리에서, 그러나 결코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언어. <풀꽃의 기억>은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남을 시집이며, 은월 김혜숙은 그 느린 시간 속에서 한국 서정시의 또 하나의 길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열어 보이고 있다.

풀꽃처럼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 그의 시가, 오래도록 독자의 마음속에서 생명력 있게 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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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섭 기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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