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관광협회, 일본 인플루언서 초청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팸투어 진행(부여 편)

2023.07.31 23:05:48

불교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운 백제역사지구, 천년 고도(古都) '부여' 역사기행 편
백제시대 왕궁터 ‘부여 관북리 유적’과 백제 사비 시대 왕릉인 '능산리 고분군',
백제의 패망과 고려의 흔적이 스며있는 '부여 정림사지' 등 답사

(충남 부여=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전라북도관광협회(회장 조오익)은 지난 26일~28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일본 인플루언서를 초청,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팸투어를 진행했다.

이번 일본 인플루언서를 초청,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팸투어는 손종두 일본어 통역사 및 문화 해설사의 안내로 익산 미륵사지를 비롯해 부여, 공주 등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유적을 되돌아볼 수 있는 행사로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백제문화의 가치와 우수성을 널리 알린다는 취지다.

이는 2015년 대한민국에서 12번 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를 통해 삼국시대 당시 백제문화의 아름다움을 되새기는 의미가 있다.

이번 행사는 일본 인플루언서를 초청,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팸투어는 백제의 세계유산적 가치를 모든 국민과 향유는 물론, 전 세계로 확산시킬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다.

다음은 지난 26일 첫날 일정으로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 및 국립박물관 견학, 왕궁리유적 답사, 보석박물관 관람 및 체험에 이어 27일 둘째 날 일정으로 불교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운 백제역사지구, 천년 고도(古都) '부여' 역사기행 편이다.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충남 부여(夫餘)는 검소하지만, 절대 누추하지 않은 곳이다. 아담하면서도 옛 왕도의 기품을 느낄 수 있는 곳, 비단 같은 금강이 펼쳐진 역사의 땅이자 찬란했던 백제 사비도성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와 능산리 고분군, 나성 등 백제역사유적 세계유산을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부여 세계유산의 첫걸음은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으로 시작된다. 관북리 유적은 백제시대 왕궁 또는 관련 시설이 자리하고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으로 유적 내에는 사비로 천도하기 이전 우선 설치한 공방, 창고 등 왕궁의 부속시설 터와 왕궁 확장을 위한 도로, 배수로 등의 시설, 건물·연못 등의 조경 시설 등이 계획에 맞춰 배치돼 있음을 볼 수 있다.

관북리 유적지를 돌아보며 백제왕궁을 마음으로 그려보고 백제 사비 시대 왕궁의 배후 산성으로 평상시에는 왕궁의 후원역할을 하다가 위급할 때에는 왕궁의 방어시설로 이용되었던 부소산성으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관북리 유적의 북쪽에 있는 부소산성은 백제인들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나고 애잔함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주검으로 절개를 바꾼 낙화암과 백제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한 천년 고찰 고란사가 있고,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는 고란사 약수와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국정을 논했던 영일루, 백마강에 잠기는 달과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며 하루를 되돌아보던 사자루, 백제 삼충신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사당 삼충사 등 많은 유적이 있다.

특히, 노을 질 무렵 부소산에 내리는 가랑비(扶蘇山 暮雨), 낙화암에 우는 애달픈 소쩍새의 울음(落花岩 宿鵑), 고란사의 은은한 풍경소리(皐蘭寺 曉鐘), 푸른 백마강에 잠긴 달빛(白馬江 沈月) 등은 옛날부터 부여 사람들만이 아는 부소산의 비경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데 부소산은 해발 106m로 완만한 산세를 갖고 있어 산책하듯 편안하게 거닐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더욱이 백제시대 왕족이 돼 태자가 산책했다는 태자 숲길을 거닐고 후원을 산책하던 왕가 나들이를 상상하며 부소산을 거니노라면 백제에 빠져 그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부소산성을 내려와 부여 시내로 조금 거닐면 백제의 정신과 미학을 잘 나타낸 정림사지 5층 석탑(국보 9호)이 보인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지만, 백제의 패망과 고려의 흔적, 수많은 사건이 스며있는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는 사비도성의 중심부에 있어 당시 매우 주요한 사찰이었으며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 문화가 백제불교 문화로 완성되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거기에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시대 유적 5층 석탑은 건축기술의 진수를 볼 수 있는 목탑양식의 석탑으로 단아한 정제 미와 우아한 조형미, 고도의 균형미를 지닌 채 단순하고 강렬하게 아름다움을 최대한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아래에서 위로 치켜보면 웅장함이 느껴지고 멀리에서 보면 주변과 잘 조화롭게 서 있는 것이 백제의 진취성과 창의성, 평온, 온순함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또한, 백제 석탑의 완성작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백제사찰건축의 원형 정림사지는 단순 종교 물이 아니라 왕권 강화로 인한 정치적 상징물이자 백제 중흥을 꿈꾼 백제인의 염원이 담겨 있는 곳이다.

이에 정림사지 5층 석탑에서 완성된 백제의 석탑조경기술은 그 후 통일신라와 고려에 이어 일본에 가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400년 동안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부여를 지켜온 정림사지 5층 석탑, 저녁노을이 탑에 걸린 풍경(百濟塔 夕照)은 더할 나위 없는 분위기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충남 부여군 정림로 83 정림사지 5층 석탑. 정림사지 5층 석탑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백제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로 백제 후기 수도 사비의 중심에 있었던 사찰 정림사지에 남아있는 석탑이다.

탑의 첫 번째 층 모서리 기둥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가 새겨 있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관점에서 '평제'이라 불리는, 백제 관점에서 수모를 겪기도 했다. 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현존하는 딱 2기뿐인 백제 시대 석탑이다.

정림사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1983년 3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발굴조사 때 강당 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 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5층 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 축선이 남북으로 일직 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국보 제9호인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보물 제108호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 출도 유물로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남아있다.

특히 국보 제9호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목탑양식을 계승한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 양식으로 평가받는다. 자리를 금당으로 옮기자 형체를 알기 어려운 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아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정림사지 석불좌상(扶餘 定林寺址 石佛座像)은 정림사지의 강당지 한복판에 있는 고려시대 불상으로, 보물 제108호이다.

높이 562㎝의 거불(巨佛)로 오른팔과 왼쪽 무릎이 떨어져 나갔고 몸체의 마멸이 심한 편이다. 또한, 머리 부분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전체적인 양식 고찰이 어려우며, 왼손의 윤곽으로 보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대좌는 불상보다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3단의 팔각연화대좌(八角蓮花臺座)이다. 상대에는 앙련(仰蓮)이 조각되어 있고, 팔각의 간석(竿石)에는 큼직한 안상(眼象)이 표현되어 있다.

하대의 윗부분에는 복련(覆蓮)이 있고, 아래의 기단석에는 각 면에 안상이 3개씩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남원 만복사지(萬福寺址)에 전하는 고려 전기의 석불 대좌 등과 비교되므로 정림사 중건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심한 듯 새겨진 눈, 코, 입과 뭉뚱그려진 몸통이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무튼, 부여는 가는 곳마다, 발길 닿은 곳곳마다 전설이 서려 있고, 백제의 역사와 왕실의 이야기가 가득한 천년의 시간이 머물러 있는 도시로 자연과 사람이 진정으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그러나 백제, 그 두 글자는 지금의 부여 땅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백제의 26대 왕인 성왕이 강력한 백제 중흥의 꿈을 안고 넓은 들판이 펼쳐진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를 결정한 뒤, 약 120여 년. 강렬했지만 아플 수밖에 없었던 백제의 기억을 찾아 부여로 떠난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은 한반도에서 끊임없이 칼을 겨누고 대립했다. 때론 한 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두 나라가 화친을 맺기도 했고, 언제 그랬냐는 듯 맞잡았던 손을 놓고 다시 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3국 간의 역학관계는 외부의 힘으로 종식되었다. 660년, 신라는 3국이 아닌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백제를 공격했고, 백제는 그 거대한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멸망에 이르렀다.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백제 정벌에 대한 기록을 남겨 지금의 우리가 그 사실을 알도록 했고, 부소산성의 낙화암에는 삼천궁녀의 전설이 남아 피로 얼룩진 당시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전의 사비 백제는 아름다웠다. 궁남지에서는 서동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엿볼 수 있고, 국립부여박물관에는 백제금동대향로와 같은 당대 최고의 걸작들이 전시되어 있다. 백제문화단지는 당시의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정수를 담고 그 우수성을 얘기하고 있다.

부여의 이야기는 너무 매력적이지만, 이를 모두 들여다보기엔 주어진 시간이 짧다. 부여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 단 하루만이라도 시간을 쪼개어 부여의 매력에 흠뻑 젖어보라.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총 8개의 유적지 중 공주지역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가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했다. 이번 세계유산 등재는 충청권에서는 최초로 선정되었다.

정림사지를 나와 논산 방향으로 차로 5분 이동하면 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이 발견된 능산리 고분군과 나성을 만날 수 있다.

백제사비시대 왕릉인 능산리고분군은 사비도성 바로 밖에 위치하고,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동아시아 석실분의 완성을 보여주는 이곳은 천장의 모습에 따라 볼트형 천장에서 평천장의 단면 육각형, 사각형 순으로 발전한 백제 고분의 변화를 알 수 있고 백제가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이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증거를 보여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되었다는 능산리 사지에서 백제의 공예 수준을 말해주는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국보 287호)와 절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288호)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이다.

1400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 백제문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의 예술, 사상, 문화의 세계를 탁월한 감각으로 표현한 최고의 걸작으로 불교, 유교, 도교를 조화롭게 나타내 백제인이 꿈꾸어 온 이상세계를 그리고 있으며 동아시아 중심에 백제가 있었다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부여 능산리의 백제시대 고분군(古墳群)과 사비성(泗泌城)의 나성(羅城) 터 중간에 있는 백제유적 발굴 현장에서 백제시대의 다양한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동체(胴體)를 연꽃봉오리로, 뚜껑은 산모양으로 만들어 많은 물상(物象)을 등장시켰고 정상에 봉황을, 아래에는 용을 배치하였다.

이로 보아 이 향로는 불로장생하는 신선(神仙)이 용과 봉황과 같은 상상의 동물들과 어우러져 살고 있다는 해중(海中)의 박산(博山) 즉 신선세계(神仙世界)이자 별천지(別天地)·이상향(理想鄕)을 닮게 했다는 전형적인 박산향로(博山香爐)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 전시 중이다.

능산리 사지 옆 그 전모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동아시아 도성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 나성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계획도시 건설의 시작인 나성은 서쪽과 남쪽으로는 금강을 천연의 장벽으로 활용하고 북쪽과 동쪽은 띠처럼 이어진 구릉을 따라 성곽을 축조하는 등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했다.

나성은 방어의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수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백제가 산자의 공간과 죽은 자의 공간을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왕도를 둘러싼 외곽성, 우리나라 역사상 왕도 전체를 외곽성으로 두른 최초사례이며 동아시아 도성의 여러 요소를 완벽하게 갖춘 나성은 사비도성을 위한 백제인의 원대한 꿈과 염원이 담겨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부여의 모습은 다양하다. 백마강 위에서 바라보는 부여는 고즈넉하다. 물길 따라 흐르는 백제를 느껴보고 싶다면 백마강을 일주하는 황포돛배에 오르기를 권한다.

백제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古都) 부여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색다른 시간이 될 것이다. 그 옛날, 사람과 물건을 잔뜩 싣고 백마강을 부지런히 오가던 배들은 이제 더는 찾아볼 수가 없다. 대신 구드래나루터에선 관광객을 모신 황포돛배가 수시로 뜬다.

구드래나루터에서 출발하는 황포돛배는 전형적인 우리 배를 본 따 만들었다. 누런 돛은 흰 광목을 황토 흙물에 삶아 색을 냈다. 짐을 실어 나르던 기능을 가진 배답게 덩치도 여느 배보다 컸던 옛날과 비슷하다.

황포돛배는 옛 돛배를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길이 19.8m, 폭 4.5m, 약 47명 정도의 인원이 승선 가능한 규모로 외형은 옛 모습 그대로를 복원하고 내부는 편의시설과 안전설비를 갖춰 안전도를 높였다.

또한, 광목을 황토물에 삶아 색을 낸 넓은 돛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황포돛배는 3.5km 구간에 걸쳐 왕복 운항을 하며, 백마강을 거닐며 부산소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담고,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경험을 선사한다.

땔감이나 소금 같은 짐을 한가득 싣고 강을 오가던 황포돛배의 길이는 약 19m에 폭은 약 3.5m 정도로 현재 황포돛배의 그 크기와 모습이 비슷하다. 이 정도면 소금 100석까지는 거뜬한 크기다. 황포돛배에 오르면 구드래나루터에서 고란사까지 돌아볼 수 있다. 직접 걸어서 바라보는 부여와 달리 배 위에서 보는 부여는 또 다른 느낌이다.

물길 따라 바라보는 부소산과 백마강 언저리는 해 질 녘에 더욱 아름답다. 운행하는 동안 돛배에서는 낙화암 이야기, 부여의 맛 '우여회' 이야기 등 부여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선상 방송을 통해 흘러나온다.

거기에 배를 운항하는 선장님이 곁들어 주는 설명은 생각지 못한 보너스다. 선장님마다 각자의 개성이 있어 다른 설명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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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섭 기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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