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아침] 정재령 시인의 '구름과 그림자'

  • 등록 2025.08.04 04:4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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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을 수 없음이 허락한, 가장 고요하고도 숭고한 사랑의 형상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물리적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존재, 그러나 언제나 서로를 염두에 두는 '구름'과 '그림자'. 정재령 시인의 시 '구름과 그림자'는 이 둘의 관계를 통해 부재와 그리움, 닿을 수 없는 사랑 혹은 영원한 기다림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를 향해 움직이지만, 결코 겹쳐질 수 없는 이 운명적 평행은 이 시를 감성적으로, 철학적으로 깊게 읽히게 한다. 구름과 그림자가 은유하는 삶의 고독과 희구는 결국 인간 존재의 외로운 숙명과 맞닿아 있다. 이 시는 조용하지만 절절한 방식으로 ‘닿을 수 없음’의 슬픔과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편집자주]

구름과 그림자

– 정재령 시인

구름과 만날 수 없는 그림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그리워하며 흘러다녔다.

매인 것과 같이
옥죄인 마음도 들 법하지만,
그러나 구름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여
도저히 그를 떠날 수 없었다.

구름 또한 그림자와 함께하되
오로지 흘러가는 대로 함께할 뿐이니,
‘나는 그를 사랑한다’ 말할 수 없구나.
그저 따라오는 짝사랑은 미련하다 하면서도
항상 어두운 표정의 그림자를 불쌍히 여겼다.

도리어 그와 함께 살아가는 시간을
고이 여기고,
이룰 수 없는 만남을 수월히 여기면서도
그리움에 가득 차 안도하며 잠이 드는 구름은
그림자가 언제든 자신을 따라오리라는 기대와 함께
평온한 밤을 맞이하였다.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그림자여,
오로지 당신만을 기다리는 구름이여.

흐름도 잊은 세월 속에
서로를 향한 그리움은 영원하구나.
만날 수 없는 그대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영원히 없으니,
오히려 그것이 그대들에게 허락된 복이며
가장 아름다운 배려.

■ 감상과 해설 / 장건섭 시인(미래일보 편집국장)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욱 순수한, 구름과 그림자의 사랑

정재령 시인의 시 '구름과 그림자'는 만날 수 없는 존재들이 품은 짝사랑의 서정을 구름과 그림자라는 시적 형상을 통해 이룰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를 이끌어낸 작품이다.

하늘 위를 유영하는 구름과 지상의 궤적을 따라붙는 그림자는 물리적으로 접점이 없지만, 서로를 인식하며 정서적 관계를 맺고 있다.

시의 화자는 구름과 그림자의 시선으로 서술을 오가며, 그리움과 사랑의 감정을 입체적으로 구성한다.

첫 연에서 그림자는 구름과 직접 만날 수 없는 존재로 설정된다. 물리적으로 닿을 수 없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그리워하며 흘러다"니는 존재. 이미 이 시는 현실과 거리두기된 사랑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존재의 서사로 출발한다.

구름은 하늘에서 흐르고, 그림자는 땅 위에서 따라다닌다. 두 존재는 공간적으로 결코 조우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림자는 "도저히 그를 떠날 수 없었다." 이것은 짝사랑의 본질이다. 선택할 수 없는 사랑이지만, 머무는 것 자체가 사랑이라는 듯.

구름의 시선에서도 감정이 뚜렷하다. 구름은 그림자를 "불쌍히 여겼다"고 한다. 동정은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며, 이때 구름 역시 그림자에 대한 연민과 정감을 지닌다.

그러나 "오로지 흘러가는 대로 함께할 뿐"이라는 표현은 구름이 능동적으로 그림자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운명처럼 함께할 수밖에 없었음을 암시한다.

시는 후반으로 갈수록 슬픔을 품은 평온으로 기운다. "이룰 수 없는 만남을 수월히 여기면서도 그리움에 가득 차 안도하며 잠이 드는" 구름의 모습은 체념과 수용의 경계에서 빛난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퍼하기보다, 사랑의 지속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구름과 그림자.
시인은 이 지점에서 그리움의 완성은 만남이 아니라 지속에 있다는 것을 조용히 말한다.

마지막 연은 이 시 전체의 주제를 응축한다.

"서로를 향한 그리움은 영원하구나 / 만날 수 없는 그대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 영원히 없으니"

이루어지지 않기에 오히려 영원한 사랑, 부재 속에서 깊어지는 감정. 시는 그것을 복이자 배려라고 한다. 이러한 시인의 해석은 고전적인 '비극적 사랑'의 도식을 넘어, 실현보다 고결한 감정의 층위를 제시한다.

정재령 시인의 시 '구름과 그림자'는 이 세상 모든 닿을 수 없는 사랑의 은유다. 물리적 거리, 시간의 간극, 혹은 사회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수많은 관계들이 이 시 속 두 존재처럼 우리 곁을 흐른다.

그러나 이 시는 말한다. 사랑은 만나야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닿을 수 없음에도 그 마음을 간직하는 데서 가장 숭고한 모습으로 완성된다고. 그리움이 끝나지 않기에,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 정재령 시인

정재령 시인은 <에세이문예> 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오페라 해설자이자 무대 예술가로서 <정재령의 즐거운 오페라 산책> 100회 기념 공연을 비롯하여 700회가 넘는 음악회에 해설 및 출연하며 예술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창적 활동을 펼쳐왔다.

오페라 대본 '헤이 피가로, 피가로'와 7080창작 뮤지컬 '옥희' 등 각색과 창작의 영역에서도 주목받았으며, 시집 <거룩한 비밀>(행복한집)을 통해 시적 감성과 종교적 성찰을 담아낸 바 있다.

현재 부천시립합창단 소프라노 상임단원으로 활동 중이며 (사)한국현대시인협회 홍보위원,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사)국제PEN한국본부 세계한글작가대회 준비위원, (사)한국산림문학회 이사 등으로 문학과 예술의 공공적 확산을 위한 다방면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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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섭 기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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