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서울 강북구(구청장 이순희)가 한국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의 성장기 거주지인 우이동 옛집을 매입해 문학자산으로 보존하기로 했다.
이 주택은 한강이 어린 시절부터 20대 초반까지 거주하며 문학적 감수성과 세계관을 형성한 장소로, 작가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억의 원형'으로 평가된다.
강북구는 지난 9월 17일 해당 주택(대지 259㎡, 지하 1층~지상 1층 단독주택)을 매입 완료했으며, 향후 리모델링을 통해 문학정신을 기리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구는 한강의 부친인 원로소설가 한승원 작가에게 "우이동 주택을 문화자산으로 보존해 문학정신을 이어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며, 긍정적 협의를 거쳐 매입이 성사됐다.
"수유리 집은 제 문학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강은 여러 작품과 인터뷰에서 '수유리(현 우이동)'를 문학적 고향으로 언급해왔다.
소설 '희랍어 시간'에서는 "수유리의 우리 집 기억하니. 방이 네 개나 되는… 마치 황홀한 환각 같던 그 광경"이라 회상했고, 한 인터뷰에서는 "저에게 집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수유리 집"이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이곳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침묵과 사색의 원천', 즉 언어가 태어난 장소였다. 좁은 골목길과 낮은 지붕, 북한산 자락의 바람이 스며들던 공간에서 그녀는 인간의 내면을 응시하는 감각을 키워냈다. <채식주의자>의 절제된 언어와 <소년이 온다>의 고통스러운 침묵은 바로 그 시절의 체험적 심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형중 교수(조선대 국어국문학부)는 "한강의 문학은 외부의 폭력에 맞서는 '고요한 저항'의 언어다"라며 "우이동의 조용한 풍경과 내면의 침잠이 그녀의 작품 세계를 구성한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부녀 문학의 혈맥, '생명과 자비'를 잇다
한강의 부친 한승원 작가(1939년생)는 전남 장흥 출신으로,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생명·불교문학의 거장이다.
1968년 단편소설 '목선'으로 등단한 이래,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다산', '불의 딸', '원효' 등 굵직한 장편소설을 비롯해, 시집 <열애일기>, <사랑은 늘 혼자 깨어 있게 하고>,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 그리고 문학서 <한승원 글쓰기 비법 108가지>, <『한승원의 소설 쓰는 법> 등을 펴냈다.
지금까지 약 100권에 이르는 저서를 발표하며, 한국문학사에 한 축을 세운 작가로 꼽힌다. 그는 1996년 서울 생활을 접고 장흥으로 내려가,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고향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문학은 "인간과 자연, 생명과 죽음, 자비와 구원의 순환"이라는 동양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 특히 <아제 아제 바라 아제>는 인간의 번뇌와 해탈을 불교적 서사로 그려내며, 영화화되어 대중적 감동을 남긴 대표작이다.
이에 비해 딸 한강은 도회적 풍경 속에서 인간 내면의 상처와 침묵의 윤리를 탐색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문학에는 공통된 뿌리가 있다.
한승원의 바다는 인간 존재의 근원을 묻는 '대자연의 언어'이고, 한강의 도시는 그 속에서 피어난 '고요한 생명'이다.
두 세계는 서로 다른 풍경 속에서 결국 '연민과 자비의 문학'으로 만나고 있다.

노벨문학상, 한국문학의 세계적 도약
한강은 2016년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며 세계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2025년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위원회는 선정 이유로 "한강의 문학은 인간의 폭력적 현실 속에서 발견한 연민과 구원의 가능성을, 시적이고 투명한 언어로 그려냈다"고 밝혔다.
그녀의 수상은 한 작가의 개인적 성취를 넘어,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중심으로 진입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문학평론가들은 "한강의 문학은 침묵과 여백의 미학을 통해, 언어를 초월한 보편적 감성의 언어를 창조했다"고 분석한다.
"기억의 집을, 살아 있는 문학관으로"
강북구는 내년 상반기 중 기본계획 수립을 완료하고, 한강의 대표작과 생애를 조명하는 상설 전시, 강연·낭독회, 청소년 문학캠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이순희 강북구청장은 "한승원, 한강 부녀가 거주했던 우이동 주택은 강북의 귀중한 역사·문화 자산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며 "한강 작가가 세계문학의 정상에 오른 성취가 강북의 뿌리에서 비롯된 만큼, 이를 보존하고 계승해 구민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가꾸겠다"고 밝혔다.
이 강북구청장은 이어 "한강 작가의 옛집을 단순한 기념물이 아닌 살아 있는 문학 플랫폼으로 조성할 계획"이라며 "기존 구조를 보존하면서 한강의 대표작과 성장사를 조명하는 전시관, 시민 문학학교, 낭독회 등을 운영해 지역의 문화 거점으로 발전시킬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이 강북구청장은 그러면서 "한승원·한강 부녀의 문학은 세대를 이어 한국문학의 품격을 높여온 정신적 유산"이라며 "우이동 주택이 문학의 뿌리를 되새기고, 새로운 창작의 불씨를 지피는 문화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문단에서는 한승원·한강 부녀의 문학세계를 "피와 언어로 이어진 세대적 서사"로 평가한다. 한승원의 서사적 리얼리즘과 한강의 서정적 실존주의가 대비를 이루면서도, 결국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동일한 근원을 가진다.
지역 문단과 시민단체들은 이번 조치가 "서울 북부권 문학관광의 새로운 거점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의 상징적 원류를 보존하는 일"이라고 평가하며, 향후 '한강 문학길(우이동북한산길)' 조성 등 연계 프로젝트 추진을 제안하고 있다.
한강 작가의 문학이 세계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남는 길'을 탐구한 결과였다. 강북구 우이동의 한 가정집이 세계문학의 씨앗이 되었듯, 이번 공간 보존은 단지 한 작가의 집을 넘어서 한국 문학정신의 장소적 복원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우이동의 작은 집 한 채는 이제 '기억의 문학관'이 된다. 그 안에서 언어는 자라고, 사색은 피어났다. 아버지의 바다가 딸의 침묵으로 이어지고, 두 세대의 문학이 한 지붕 아래 다시 숨을 쉰다. 문학의 고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누군가의 집 한 켠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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