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예술혼이 깃든 선비의 육필 편지 읽기

2023.11.19 18:53:27

"붓은 기성 질서나 그 질서 속에 유통되는 가치관과 의식을 대변한다"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옛 선비들은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붓글씨로 일필(一筆), 우체국에 나가서 우표를 붙이는 것은 낭만이다. 만년필이 나오면서 붓을 대신하는 변천은 은근한 혁명이다.

다시, 시대는 바야흐로 인터넷의 발전과 휴대 전화의 실용화 속에 선비의 육필 편지를 받는 것은 흔치 않다.

세모(歲暮)가 오고 있는데 임승천 시인의 육필 편지다. 시도반(詩道伴)의 <시원의 입술>을 시집을 받은 임 시인은 시집 안의 '시원의 입술'을 붓글씨로 화선지에 정성을 다하여 보내왔다. 붓글씨로 보니 전혀 다른 감정이다. 새삼 스럽다.

'시의 둘레길은 푸른 별이 뜨는 정원/ 시의 꽃을 무한대로 '시화무'가 피워내고/ 해와 달이 먼 강물에 발을 적시는 시간이면/ 풀이 꺾이는 바람에도 생을 끌어안고/ <시원의 입술>은 이렇게 살아 노래 부른다// 안개 끼고 앞산이 보이지 않아도 시원의 빛은/ 산빛 맑게 단장 하듯 정결한 입술로 다가선다/ 배꽃의 입술은 희디흰 순결의 말씀 되어/ 우주의 노래 부르고 물방울 속에 시간의 무늬를 그린다// 저 들판의 강물은 하얀 시간 되어 굽이굽이 흐리고/ 또 다른 말씀은 구름 사이/ 감돌며 가난한 자에 다가온다/가까이 멀리, 낮은 자에 들려주는 입술 경건이여/ 시대의 중심에 서서 우리를 다독이는 문장들이 시원에 내린다'

붉은 낙관을 누르고 '임승천 시인이 쓰다'로 마무리한 육필은 청정하고 담상담상하다. 시를 붓글씨에 의하여 읽는 것은 맛이 다르다. 붓은 선비를 좋아한다. 붓은 선비에게 자유의 영역이다. 붓은 기성 질서나 그 질서 속에 유통되는 가치관과 의식을 대변한다. 이러한 붓의 힘은 세계를 관통하고 자유에 관한 탐구가 된다. 붓은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붓은 조선 왕조 법을 만들었다. 붓은 세종 대왕의 한글을 탄생시켰다. 붓은 서예라는 높은 예술의 장르를 만들었다.

임 시인은 교사를 천직(天職)으로 알았다. 시를 창작하면서도 가곡 가사를 즐겨 쓴다. 가곡이 시들한 시대를 늘 아쉬워한다. 가곡의 부흥을 위하여 20여 년째 부단한 노력을 한다. 근 200여 곡을 창작하여 심심찮게 방송을 탄다. 언어와 음악은 시와 음악 간의 핵심이며 오랜 기간 존중되어왔다. 가곡은 가곡대로 대중가요는 대중가요대로 발전하는 것이 순기능이라는 것을 임 시인은 강조한다.

임 시인처럼 육필을 쓰는 선비들이 있다. 박이도 시인은 최고의 지성인들에게 받은 육필 편지를 묶어서 <내가 받은 특별한 선물>이라는 산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박이도 시인이 평생 받아 소장한 육필 편지다. 박 시인이 골라낸 마흔여덟 분의 시담(詩談)이다.

이 책은 1959년 자유신문,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60여 년간 문학 활동을 하면서 시인이 받아 소장 한 육필들이다. 이런 유의 산문집은 박이도 시인이 처음이다. (스타북스, 2022. 03. 30.) 시인의 책에는 보내준 분들과 인문학적 교유와 일화들이 봄빛처럼 떠오르고 있다. 더러는 작고한 선비들이다. 그야말로 육필의 값으로는 환산 불가능한 가치다.

이 책을 넘기면서 시인의 이름만 들어도 그저 놀랍다. 김광균, 서정주, 조병화, 박희진, 이탄, 오규원, 미광수, 박목월, 김영태, 이승훈, 조태일, 김현승 등 한 분 한 분 모두 한국 현대문학사를 대표하는 시인들이다.

이경남, 강인섭, 문익환 같은, 시인이면서 언론인 목회자로 활동했던 분들, 전영택, 황순원, 이청준, 김승옥, 현길언 같은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다. 한 시대 방송가의 전설인 신봉승, 주태익 선생, 여기에 화가 송수남, 서예가 박종구, 수녀 이해인 등 우리 시대의 으뜸의 선비들 이름이 들어있다. 박이도 시인은 대학 강단에서 정년 했다. 선비는 늘 자료로 말을 한다.

시인은 숨결이 들어있는 육필로 후학에 편지의 중요성을 강의하는 것이다. 시도반에게는 한국 시단을 대표한 시인들의 육필 사인 판이 있다. 권일송, 박재삼, 이형기 시인들의 육순에 만든 사인 판이다. 옛 한국일보 사옥인 송현 클럽에서(1993년) 소년한국 김수남 사장이 300여 문인을 초대한 자리였다. 임승천 시인의 육필 편지 이야기를 하다, 여러 갈래의 말이 되었다. 임승천 시인의 육필 붓글씨를 표구에 넣어 서재에 걸어둔다.

- 최창일 시인(시집 ‘시화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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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섭 기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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