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 특히 야당사가 남겨준 불행한 유산이 하나 있다. 투쟁을 야당 정치의 제1 덕목으로 간주하는 관습이 그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에 기초해 있다.
그 다양한 이해집단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복수의 정당이 필요하고 정당들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최대공약수를 찾는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정당정치고 정당정치는 대화와 타협의 정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야당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였다. 장내에서는 소수의 한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툭하면 단상점거, 원천봉쇄를 일삼았다. 그러다 여의치 않으면 아예 민의의 전당을 외면하고 장외투쟁을 능사로 삼았다.
이는 물론 야당만의 책임이 아니다. 멀리는 쿠데타와 독재로 점철된 불행한 현대사에 그 연원이 있다. 헌법은 ‘민주공화국’임을 표방하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해 놓았는데 총구에서 나온 권력이 횡행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선명(鮮明)이 최고의 덕목이요 투쟁이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야당의 무한반대 체질은 ‘반대’ 그 자체가 가슴 설레는 단어였던 불행한 현대사에서 배태된 것이다.
정치에서 ‘반대’라는 단어는 견해가 다르다는 뜻이며 이 말 속에는 이미 절충의 여지가 들어있다. 그러나 한국정치에서는 불행하게도 절충의 여지를 갖는 반대는 즉시 ‘사꾸라‘로 몰린다. 검은 것과 흰 것의 중간, 양 극단의 절충론자를 회색분자라고 해서 매도하는 정서 속에서 반대는 그냥 반대가 아니라 결사반대여아 한다.
타협은 곧 변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나라 정치사에는 ’회색분자‘로 몰려 침몰한 아까운 정치인이 많았고 야댱가에서는 상대방을 ’사꾸라‘로 몰아 매장하는 전술이 심심찮게 동원되기도 했다.
‘죽었으면 죽었지 안 된다’는 말이 예사로 통용되는 지독한 독선주의가 언제 어떻게 백의민족의 정서 속에 뿌리 내렸는가?
아마도 조선조의 사색당쟁에 그 뿌리가 있을성 싶다. 혹자는 조선조의 사색당쟁이 근대 정당정치의 견제와 균형(Chek &Barance)의 한 형태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런 점도 있다. 그러나 조선조의 붕당(朋黨)은 국리민복의 방법론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주자학(朱子學)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방법론이라면 ‘최선이냐’ ‘차선이냐’의 논쟁이 되겠지만 국시(國是)와 직결되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가 없다.
모든 논쟁이 옳고 그름, 선과 악, 정(正) 과 사(邪)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사례가 1659년과 1674년 두 차례의 예송(禮訟)이다. 효종(孝宗)이 사망했는데 효종의 어머니 조대비의 복상(服喪)을 놓고 서인과 남인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서얼자(庶孼子)는 기년(朞年)’이라는 주자가례의 조항이 태풍의 눈이었다.
효종은 차남이기 때문에 마땅히 기년(1년)이어야 한다는 것이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노론 측 주장인 반면 허목(許穆)을 비롯한 남인들은 차남이지만 왕통을 이었기 때문에 적장자 복(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싸움은 노론의 승리로 끝났으나 14년 후 이번에는 효종 비(妃)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즉 인선왕후를 적장자 며느리냐 아니냐를 놓고 논쟁이 붙은 것이다.
중국이 조선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칭송했듯이 조선의 예학(禮學)은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보다 훨씬 발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선조의 당쟁은 이 예학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교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비타협 노선을 선호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 정서에 기반 해서 자유당, 유신, 5공 독재를 거치면서 선명(鮮明) 노선이 야당의 덕목으로 체질화 됐다. 그러나 이제 다르다. 지금의 여, 야 적어도 수평적 정권 교체 이후의 여, 야 관계는 절차적 정당성을 갖춘 정상적인 경쟁관계다. 원천반대 무한반대가 박수를 받는 시대가 아니다. 야당은 하루빨리 체질화 된 무한반대의 오류를 깨달아야 한다. 지금은 조선조의 당쟁시대, 자유당, 유신, 5공 독재시절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