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3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정치일반

[문재인 정부출범] 문재인 대통령이 걸어 온 길

'노무현 친구'에서 '광화문 대통령'으로 거듭



(서울=미래일보) 정정환 기자 =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번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정치권에 입문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구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1년 자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발간한 문재인의 운명에 적은 글이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친노(친노무현) 유산을 물려받은 정치인’ ‘노무현의 적자로 불렸던 그가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결국 홀로서기에 성공한 셈이다.

 

1953년에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문 대통령은 29세에 부산에서 변호사 노무현을 만났다. 그의 인생에 노 전 대통령을 알기 전보다 노 전 대통령과 함께 하거나 노 전 대통령을 그리워한 시간이 더 많다는 얘기다. ‘대선 재수에 도전했던 기간에도 그는 가장 그리운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거침없이 당당하게 노무현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문재인의 운명에서 당신(노 전 대통령)은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고 쓴 대목이 유독 눈에 띈다. 본인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운명이 결국 노 전 대통령에서 시작됐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과 만난 것은 굴곡진 우리 현대사 때문이며, 그가 재수하여 1972년 경희대 법대에 입학한 첫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선언이라는 정치적 폭탄을 맞게 됐다. 1975년 총학생회에서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하던 그는 구속과 동시에 제적당했다. 담당 판사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석방됐지만 강제징집을 당해 특전사에서 군복무를 해왔으며 자랑스럽게 여겨 왔다.

 

제대 후 바로 복학이 되지 않아 복학 전까지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결심하고 전라남도 해남에 위치한 대흥사에서 공부해 19791차 시험에 합격했다. 10·26 사태 이듬해인 19803월 복학했지만, 당시 신군부의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두 번째 구속을 당했다. 그러나 유치장에서 뜻밖의 사시 2차 합격소식을 지금의 부인인 김정숙씨로부터 전해 들었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해 판사 임용을 희망했지만, 두 차례 구속 전력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아울러 변호사 개업을 위해 낙향하듯 내려간 부산에서 만난 사람이 변호사 노무현이었다. 두 사람은 곧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의 동업자가 됐다. 이후 1988년 노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권에 들어갈 때까지 인권변호사 활동을 함께 했다. 당시 상황을 부산 경남 울산 창원 전체에 인권변호사는 3-4명에 불과했다. 다들 정치권으로 가고 혼자 남았다 노 전 대통령의 서울 여의도 입성 후 문 후보는 부산에서 노동운동 지원 활동을 계속했다.


두 사람은 문 후보가 2002년 대선 경선에서 노 전 대통령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으며 재결합했다. 노 전 대통령 당선 이후 문 후보는 정치권에 들어서기를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끝내 그를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노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이던 200313일 문 후보를 불러 달리 맡길 사람이 없으니 민정수석을 맡아 달라고 짧게 부탁했다고 한다. 문 후보는 고심 끝에 민정수석으로 끝내겠다. 정치하라고 하지 말라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걸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과중한 업무에 힘겨워했던 문 대통령은 1년 여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그러나 2004년 히말라야 트래킹 도중 노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는 소식에 급거 귀국, 노 전 대통령 대리인단으로 참여했다. 노 전 대통령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된 후 그는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고, 이후 민정수석을 다시 역임했다. 민정수석을 마친 후 다시 청와대를 떠났지만, 노무현정부 마지막해인 20073노무현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청와대에 다시 들어왔다.

 

노 전 대통령 서거는 국민이 정치인 문재인을 알게 된 계기였다. 그의 정치여정이 시작된 출발점이기도 하다. 특히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혼자서 묵묵히 감내하던 문 후보의 모습은 많은 국민에게 각인됐다. 그는 문재인의 운명에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일을 내 생애 가장 긴 하루였다. 그날만큼 내가 마지막 비서실장을 했던 게 후회된 적이 없다. 시신 확인에서부터 운명, 서거 발표, 그를 보내기 위한 회의주재까지. 나 혼자 있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했다고 회고했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 당일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이 헌화에 나서자 백원우 전 민주당 의원이 정치 보복에 사과하라며 고함을 쳤기 때문이다. 문 후보는 영결식이 끝날 무렵 이 전 대통령을 찾아가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 자격으로 조문오신 분에게 예의가 아니게 됐다. 결례가 됐다고 사과했다. 검찰은 백 전 의원을 장례식 방해죄로 기소했지만, 법원은 결국 무죄를 선고했다.

 

노 전 대통령과의 기억, 청와대 시절, 퇴임, 서거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문재인의 운명정치인 문재인을 세상에 알리는 도구가 됐다. 그는 2012년 대선 패배 이듬해 내놓은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제가 대선 출마까지 간 것도 결국은 문재인의 운명출간에서 시작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적었다.

 

이후 문 후보의 정치인생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2012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에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고, 그 해 민주통합당 후보로 제18대 대선을 치렀다. 그는 48% 득표로 선전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3.53% 포인트 차로 패배했다. 대선 이후 당권과는 거리를 둬왔지만 서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공개’ ‘세월호 단식등 정치 이슈의 한복판을 떠나지는 않았다. 그는 201412월 당 대표 선거에 전격 출마해 당권을 쥐었다.

 

그러나 문재인호는 오래 가지 못했다. 20154월 재보선에서 전패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그해 겨울엔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가 당을 떠나면서 분열이 리더십이라는 야권 비주류의 십자포화를 맞기도 했다. 결국 그는 김종인 비대위 대표에게 당권을 물려주고 물러났다. 당 대표 사퇴 후에도 문 후보는 몇 차례 위기에 봉착했다. 지난해 20대 총선에서는 호남 지지 철회시 대선 불출마라는 승부수를 띄웠으나 민주당은 호남 28석 중 3석을 얻는데 그쳤다.

 

20대 총선 이후에도 위기는 있었지만, 그는 탄핵 정국에서 확보한 대세론을 끝까지 내세워 본선 티켓을 손에 쥐었다.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서도 국민의당과 범보수 진영의 집요한 네거티브 공세에 시달려 왔다. 특히 아들 준용씨의 한국고용정보원 취업특혜 의혹이 가장 대표적인 공격 포인트였다. 그러나 모든 정치적 공세를 촛불 민심이라는 든든한 우군과 적폐청산이라는 분명한 정치적 슬로건으로 물리치고 결국 대권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사법연수원 차석, 성공한 인권 변호사, 청와대 비서실장, 1야당 대표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유년기는 가난의 연속이었다. 부모는 195012월 흥남철수 당시 미군 선박을 타고 경남 거제의 피난민수용소에 도착했다. 한국전쟁의 끝자락인 1953124일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그는 크레용보다 부드럽게 칠해지는 크레파스는 사 본 적이 없고, 남자아이들이 다 다녔던 태권도장에 다니고 싶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학교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수업 중 쫓겨나는 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용돈을 벌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어 낚시용 미끼인 참갯지렁이를 채집해 낚시가게에 팔기도 했다.

 

가정은 가난했지만 열심히 공부했기에 당시 부산 명문인 경남중에 입학했다. “부친이 가장 기뻐하셨던 일이 경남중 시험에 합격했던 일이라며 한강 이남에서 가장 명문학교로 이름난 학교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아이들이 몇 달씩 선행학습을 해 왔고, 집에 가보면 정말 놀랄만한 저택과 정원이 있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세상이었다그런 걸 보면서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인권 변호사로의 인생이 어릴 때의 체함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그가 일찍 겪은 양극화의 경험이 오늘날 그를 광화문 대통령으로 탄생시킨 셈이다.

 

대통령은 10일 취임식에서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자신의 통합대통령 의지를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회에서 취임선서 직후 발표한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군림하고 통치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화하고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아울러 "권위적인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다""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했다. 앞으로 "참모들과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겠다""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jhj0077@hanmail.net

 

배너


배너
배너

포토리뷰


배너

사회

더보기
불법어업 단속 중 순직 공무원, '별도 심의 없이 유공자 등록' 추진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국가가 안전·보건 조치를 필수적으로 시행하는 해양경찰과 달리 사각지대에 있는 어업단속 공무원의 안전관리와 재해보상이 강화된다. 일반직 위험직무 순직 공무원도 보훈부 심의 절차가 생략되고 국가유공자 등록이 가능하도록 제도가 개선될 전망이다. 인사혁신처와 해양수산부는 제9회 서해수호의 날을 맞아 어업단속 공무원들의 안전을 지킬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어업지도선 안전 점검을 시행한다고 22일 밝혔다. 지난 5년 동안 불법 어업을 단속하다가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해수부 소속의 어업관리단 일반직 공무원은 45명(군인, 경찰 제외)에 이르고 업무 수행 중 사망해 순직이 인정된 사례는 3건인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서해 수역에서 배타적경제수역(EEZ)을 넘어오는 외국 어선을 단속하는 서해수호 임무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해수부는 이 같은 사고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어업감독 공무원 886명을 대상으로 안전 역량 강화교육을 해마다 실시하고 안전 장비를 확대 보급하고 있다. 나아가 이번 서해수호의 날을 계기로 지도선 안전관리 등을 위한 현장 점검에도 나선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인사처는 공상을 입은 공무원

정치

더보기
[인터뷰] 4선에 도전하는 김민석 영등포을 후보이자 민주당 총선 상황실장 "민생 해결이 최우선"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4선 국회의원에 도전하는 김민석 서울 영등포을 후보이자 더불어민주당 총선 상황실장은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열람실에서 인터넷언론이연대 회원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민생 해결이 최우선"임을 강조하며 다가오는 4월 10일 총선을 앞두고 전략과 비전을 밝혔다. 김민석 상황실장은 현재 총선 판세에 대해 "여론조사 결과 오차 범위 5%를 넘어서는 곳을 안정적인 우세 지역으로 본다"며 "공식적 발표는 아니지만, 더불어민주당의 우세 지역은 110석 정도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 상황실장은 그러면서 "국민의힘의 우세 지역 82석에 대한 분석은 너무 낮게 잡힌 것"이라 지적하며 "국민의힘의 전통적 지지층과 보수층이 위기감을 느껴 결집하는 현상이 보이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백중세가 많아 과반을 확보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고 전했다. 김 상황실장은 이번 선거의 핵심으로 민생 경제를 꼽았다. 이런 점에서 최근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 일부 후보의 대파 가격 발언을 문제로 보았다. 윤 대통령은 총선을 앞두고 대파 875원은 합리적이라고 발언했다. 또, 이수정 국민의힘 경기 수원시정 후보는 윤 대통령 발언이 도마에 오르자 "대파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