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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창일 시인, 시인이 바라보는 궁중 언어

조선 궁중 언어와 현대 권력 언어의 구조를 읽다
성체·용안·수라… 왕권을 떠받친 말의 장치들, 오늘의 권력 언어는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조선 궁중의 언어는 흔히 사극 속 전형적인 말투 정도로 소비된다. 그러나 그 언어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왕권을 떠받친 정교한 상징 체계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궁중 언어의 구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형태만 달라졌을 뿐 오늘날의 권력 언어 속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왕의 몸을 가리키는 말들을 보면, 일상 언어와 철저히 결별하려는 의지가 뚜렷하다. '몸'이라는 평범한 단어 대신 성체(聖體)·옥체(玉體)라는 표현이 쓰일 때, 왕의 육신은 더는 인간의 한계를 가진 신체가 아니라 하늘의 명을 받은 초월적 매개체가 된다.

'성체'는 그 자체로 신성함을 부여하는 한자 성(聖)을 붙여 왕의 몸을 종교적 숭배의 대상에 가깝게 끌어올리고, ‘옥체’는 옥이라는 물질이 가진 순결·고결의 이미지를 통해 육체를 하나의 귀물로 치환한다.

이는 단지 고급스러운 표현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왕권의 정당성을 “몸의 차원”에서까지 보증하려는 상징 작업이다. 인간의 신체는 늙고 병들지만, 성체·옥체라는 호명은 그 유한성을 은폐한다.

얼굴과 눈물, 손과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용안(龍顔)이라는 말은 왕의 얼굴이 개인의 인상을 넘어 국가 그 자체의 상징이자 하늘의 대리자인 용의 형상임을 암시한다.

왕의 눈물은 '눈물'이라 부르지 않고 용루(龍淚)가 된다. 이는 군주의 감정까지도 일상적 감정과 분리해 그 기쁨과 슬픔을 ‘백성의 운명’과 동일시하는 정치적 수사다.

어수(御手), 옥음(玉音) 역시 "왕의 손", "왕의 목소리"라는 설명적 표현을 넘어서 손과 말에 권력적 효력을 부여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왕의 손길은 법을 제정하고 신하를 임면하는 손이며, 왕의 음성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곧 명령이다.

신체를 가리키는 이들 궁중어는 결국 왕권이 "몸을 통해 말하는 방식"을 시각화·청각화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왕이 앉는 자리, 즉 용상(龍床)은 이러한 신체적 상징이 물질과 공간으로 확장된 형태다. 용상은 문자 그대로 '용의 침상'이지만 실제로는 왕이 국정을 수행하는 공식 좌석을 가리킨다. 왕이 용상에 오르는 행위는 한 개인이 의자에 앉는 동작을 넘어 "하늘의 명을 위임받은 주권이 현현하는 순간"으로 연출된다.

용상은 궁궐 건축 구조 속에서 가장 높은 단에 놓이고 장식과 배치, 시선의 동선까지 모든 것이 그 자리를 중심으로 짜여 있다. 신하들은 용상 앞에서만 엎드려 절하고 중대한 국정 논의는 항상 그 아래에서 벌어진다.

이렇게 볼 때 용상이란 "왕의 몸이 앉는 장소"라기보다 "왕의 몸조차 그 안에 포섭되는 상징적 기구"이다. 왕이 용상에 앉을 때, 그 역시 이 장치가 요구하는 동작과 말투, 시선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는 점에서 용상은 인간으로서의 왕을 제도 속 인물로 다시 빚어내는 의례적 도구이기도 하다.

궁중 일상에서 쓰이는 용어들 역시 이 상징 체계의 일부다. 왕의 밥은 수라, 그 밥상이 올려지는 자리는 수라상 혹은 어상이다. 밥과 상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상어이지만 왕의 밥은 그 순간 '국가 운영을 지탱하는 에너지'라는 의미까지 부여되며 그릇과 상은 예법과 위계가 실린 공간이 된다.

수라간은 단순한 부엌이 아니라 "왕의 생명을 관리하는 관청"이며,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언어 역시 평범한 조리용어와 구분된다. 이렇게 왕의 먹고 입고 자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언어가 따로 마련될 때 왕의 일상은 백성의 일상과 완전히 다른 층위로 격리된다.

언어는 곧 접근 권한이기 때문이다.

왕비와 세자,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공간을 지칭하는 궁중어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중전, 중궁, 내전, 곤전 같은 표현은 "사람의 이름"보다 "장소의 이름"을 앞세운다. 중전마마는 본래 '중궁(中宮)에 거처하는 이'라는 의미이고 동궁은 '동쪽 궁전에 거하는 세자'를 가리킨다.

이는 인물을 직접 호출하기보다 그가 차지한 공간과 지위를 먼저 부르는 방식이다. 궁중어가 인물의 개성을 지워 버리는 이 특징은 개인보다 역할을 앞세우는 유교적 관료제의 속성과도 맞닿아 있다.

왕과 왕비, 세자는 각자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의 기능과 위치로 말해진다.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을 "하나뿐인 개인"이 아니라 "제도 속 한 자리"로 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이러한 궁중 언어의 구조는 왕조가 사라진 오늘에도 낯설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도 권력은 종종 일상 언어 대신 특정한 권위적 언어를 사용한다.

'국민 여러분'이라는 호명, '대통령의 메시지', '공식 입장', '국정 철학' 같은 표현들은 개인의 말과 감정을 제도와 권력의 말로 바꾸는 장치로 작동한다.

조선 궁중에서 성체와 용안, 옥음이 왕권의 상징이었다면 오늘의 사회에서도 언어는 여전히 권력을 장식하고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문학이 궁중어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라진 왕조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오늘 우리가 쓰는 말 속에 남아 있는 위계와 장식의 구조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궁중어는 과거의 언어이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가 누구에게 어떤 말을 쓰며 어떤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성찰하게 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 최창일 시인(이미지 문화평룬가)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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