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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향기] 홍중기 시인의 '패랭이 꽃은 언덕 위에 피고'

분단의 상처를 딛고 핀 삶의 꽃…분단의 슬픔과 화해의 요청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홍중기 시인의 시 '패랭이 꽃은 언덕 위에 피고'는 분단과 전쟁의 상흔을 끌어안은 민중의 기억을 시적 서사로 풀어낸 가슴 시린 평화시이다. 시는 언뜻 고요한 농촌 풍경에서 시작하지만, 그 이면에는 역사적 비극인 6.25 한국전쟁의 고통과 아픔이 응축되어 있다.

시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패랭이꽃은 한적한 고갯길, 그리고 농부의 삶 속에 피어난다. 이는 민초들의 삶의 터전, 일상의 배경으로 그려지면서 동시에 전쟁의 상흔과 대비되는 상징적 존재로 기능한다.

언덕 위의 패랭이꽃은 무심히도 아름답게 피지만, 그 아래엔 깊은 숨을 몰아쉬는 할머니의 지친 육신, 그리고 돌무덤, 소나무, 서낭당이 깃든다. 모두가 한 맥락 안에서 민속과 전쟁, 생명과 죽음을 아우르는 상징들이다. [편집자 주]

패랭이 꽃은 언덕 위에 피고

- 홍중기 시인

패랭이꽃
붉게 피는 고갯길
할머니는 황소 등에 누워
깊은 숨 몰아쉰다

서낭당에 우뚝 솟은 소나무
돌무덤 쌓이는 사연
알듯 모를 듯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천둥소리는
대포소린데 그들은 사람의 더러운 손으로 빚은 소리를
알지 못하네

한나절을 달려온
농부의 지게다리는
패랭이꽃에 주저앉고
물 두레박에 찌든
무명적삼
하얀 엄마 젖엔
갓난아이가 매달려 운다

75년전 그날은 네 살난
사내아이가 전쟁터로
걸음마를 하고
누이 동생의 죽음을 부르짖는
어머니의 한을 기억 할 수
있을까?

포탄은 동네 한복판에서
도깨비의 춤을 추며
할아버지의 집은 삼촌의
모습도 함께 삼키네

6.25 전쟁은 500만명의 생명이
쓰러지는 소꿉놀이
죽고 죽고
죽어서 말하리
사람의 욕심이
하늘과 땅사이로
넘쳐 흘러
죽음의 바다로
죽음의 산으로
쌓이고 흐르네

당신은 20세의 청년이
80세의 노인으로
홀로 남은
6.25를 보았는가

뼈를 깍는 고통보다
더 아픈 헤어짐의 고통을
끌어안고
마지막 죽음으로
와 있는 이산가족의 모습을……

우리 이제는 만나야 하네
한 민족이 두 민족으로
갈라진
비극의 아침을 접어 두고
지구촌의 한 마을로 모여
사람은
사람답게 사는
이야기를 해야 되네.



■ 감상과 해설 / 장건섭 시인(본지 편집국장)

언덕 위에 핀 꽃, 역사 위에 핀 시

홍중기 시인의 시 '패랭이 꽃은 언덕 위에 피고'는 한국전쟁 75주년을 맞은 오늘, 여전히 지속되는 분단의 고통과 민족적 상흔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는 전쟁을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겪은 개인과 민중의 기억, 그리고 그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삶의 형상을 조용하고도 절절하게 응시한다.

시인은 75년 전의 전쟁을 '네 살 난 사내아이가 걸음마를 하던' 기억으로 회상한다. 즉, 기억의 주체는 시간이 흘러 80세가 되었지만, 그때의 상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당신은 20세의 청년이 80세의 노인으로 홀로 남은 6.25를 보았는가"

천둥 같은 포탄 소리는 당시의 대포 소리로 바뀌어 들린다. 그러나 그 소리는 "사람의 더러운 손으로 빚은 소리"로 묘사되며, 이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빚은 비극임을 암시한다. 전쟁의 참혹함은 “도깨비의 춤을 추는” 포탄으로 형상화되고, 한 가족의 소멸로 구체화된다.

시의 제목에 등장하는 '패랭이꽃'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다. 이 꽃은 고갯길, 농부, 무명적삼, 엄마의 젖, 갓난아이의 울음과 연결되어 민초의 삶과 연명을 상징한다. 피고 지는 들꽃의 존재는 생명력과 연약함, 동시에 살아 있음의 저항을 품는다. 그것은 전쟁을 넘어 계속되어 온 민중의 끈질긴 생존과 기억의 은유이자, 이 땅의 고통과 상처를 말없이 품고 피어난 생의 증언자이다..

민중의 언어로 새겨낸 전쟁의 서사

시인은 전쟁을 단순히 '대포소리'나 '포탄'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도깨비의 춤을 추며", "삼촌의 모습도 함께 삼키는" 정서적 풍경으로 풀어낸다. 어린아이의 걸음마, 어머니의 젖, 할머니의 한숨, 무명적삼에 밴 노동의 땀방울 등은 모두 전쟁이 파괴한 평범한 일상의 단면들이다. 이는 곧 정치적 구호나 이념으로 포장된 전쟁 담론과는 거리를 둔, 민중의 언어로 쓰인 전쟁 서사다..

시 후반부로 갈수록 시인은 점점 더 개인적인 서사에 다가선다..

"20세의 청년이 80세의 노인으로".
"홀로 남은 6.25를 보았는가".


이 구절은 역사 속의 '개인' -곧 전쟁 생존자의 주체적 시선-을 환기시킨다. 분단은 단지 두 나라로의 이념적 분리가 아니라, 수많은 개인들의 시간과 감정, 가족과 일상을 파괴한 현실이다. 시는 이를 통해 전쟁의 실체가 얼마나 거대하면서도 사적이며, 깊은 내면을 해치는가를 보여준다..

평화와 통일, 그 절실함에 대한 시적 명령

종결부는 이 시의 가장 강력한 윤리적, 인문학적 메시지를 담는다..

“우리 이제는 만나야 하네.
한 민족이 두 민족으로 갈라진.
비극의 아침을 접어 두고…".


시인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지 않는다. 그는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며 평화를 향한 윤리적 실천을 요구한다. 단절된 이산가족의 고통, 전쟁의 반복을 두려워하는 세대의 불안을 모두 통합해 '사람답게 사는' 시대적 요구를 역설한다. 이는 시가 단순한 정서적 공감에서 그치지 않고, 윤리적 호소와 사회적 실천의 언어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그 문학적 가치가 크다..

형식적으로 이 시는 민중시와 서정시의 경계를 오가며, 일상의 언어로 고통을 담담히 풀어낸다.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시인의 내면과 집단의 기억을 동시에 길어 올리는 집합적 정서의 울림이 크다. 시인은 역사적 비극을 개인과 가족, 공동체의 삶으로 끌어내면서도 그 모든 절망 속에서 평화와 희망의 가능성을 간절히 그려낸다..

'시'는 기억을 넘어 연대의 언어다.

홍중기 시인의 '패랭이 꽃은 언덕 위에 피고'는 단순한 전쟁의 추모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윤리를 묻는 시이며, 평화를 요청하는 시적 선언이다. 6.25를 기억하는 오늘, 시인은 우리에게 말한다..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하고, 평화는 시를 통해 다시 말해져야 한다고.


■ 홍중기 시인

홍중기 시인은 1982년 첫 시집 <아기 걸음마>를 통해 문단에 나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감성적 서정과 삶의 깊이를 아우르는 시 세계로 독자들과 만나온 그는, 시 외에도 방송과 언론 분야에서 다채로운 이력을 쌓으며 글과 말의 영역을 넘나드는 활약을 펼쳐왔다.

경향신문, 레이디경향 등에서 연기자 및 인물 칼럼을 연재했고, 한국일보와 주간한국 등지에 방송칼럼을 수년간 기고하며 필진으로 활동했다. 방송계에서는 MBC-TV 공채 5기로 입사하여 방송 현장을 두루 경험했으며, 베트남 나트랑과 사이공 방송국에서 종군기자로 근무한 이력은 그의 시 세계에 전쟁과 인류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더했다.

문학단체에서도 활발히 활동한 그는 (사)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사)한국문인협회 홍보위원 및 윤리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남양주시인협회 고문과 한국전쟁문학회 회장을 맡아 시 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역사적 성찰을 견인하고 있다.

출간한 시집으로는 <아기 걸음마>, <당신을 사랑하고 죽습니다>, <패랭이꽃은 언덕 위에 피고> 등이 있으며, 인간의 존재와 상처, 고통 속의 구원, 민족의 분단과 전쟁의 비극 등 다양한 주제를 시로 풀어내며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학문적 배경으로는 월남군사어학교를 졸업한 후, 호남대학교 도시계획학과, 성균관대학교 국정전문대학원에서 수학하며 사회와 국가, 공간과 인간에 대한 시각을 다각도로 확장시켜왔다.

삶의 현장과 시대의 굴곡을 시로 증언해온 그는, 한국 현대시의 굵은 흐름 속에서 여전히 따뜻한 시선과 성찰적 언어로 독자와 마주하고 있다.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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