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하이쿠(俳句) 시는 17자의 짧은 장르다. 정형 운문으로 450년 전부터 일본의 상류사회, 서민사회까지 사랑을 받았다.
짧은 시는 긴 시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 몇 마디의 말, 눈빛, 손짓 같은 것으로 언어 너머의 것을 이야기한다. 바쇼(芭蕉)는 학인들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모습을 먼저 보이고 마음은 뒤로 감추어라." 시의 의미는 뒤로 감추고 모습(形)을, 풍경을 먼저 보이라는 것이다.
설명하지 말고 묘사를 말한다. 자신의 감정을 직접 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류라 하는 것은 옳다. 하이쿠는 눈으로 보이고 눈으로 만질 수 있는 가시적인 것을 보인다. 17자로 구성되는 한 줄의 정형시는 계절과 자연을 노래하면서 인간의 실존에 가장 근접한 문학으로 평가받는다.
문명권에서 창작된 가장 짧은 장르에 꼽힌다. 그러고 보면 유럽에서는 소네트, 일본의 하이쿠 한국의 시조가 일정 부분 비슷한 면을 공유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비롯해 많은 시인은 자국어로 하이쿠 시를 만들었다. 영국의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시인이나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하이쿠를 즐겨 만들었다.
노벨 문학수상자인 멕시코 작가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Rozano는 마츠오 바쇼의 하이쿠를 좋아해 바쇼의 하이쿠 시를 직접 스페인어로 번역했다. 일본의 하이쿠 시인으로 마츠오 바쇼,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등이 있다.
바쇼는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 등장해 일본 문화를 잘 모르는 한국인에게도 약간의 인지도가 있는 편이다. 하이쿠가 한국에서는 그리 유명세를 치르지 않는 것은 한국인의 일본 문화에 대한 반감의 작용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60년대 이어령 교수는 일본을 들어 '축소지향의 나라'로 소개하여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은 모든 물건을 소형화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게 하는 기술의 나라다. 하이쿠도 일본의 축소지향 문화 속에 하나의 장르로 보인다.
'허수아비 뱃속에서/귀뚜라미가/울고 있네' / <잇사>.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어, 다시 올라가네!/나비였네' <모리다케>. '미안하네, 나방이여/난 너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그냥 불을 끄는 수밖에’ <잇사>. '붉은 꽃잎 하나가/소똥 위에 떨어져 있다/마차 불꽃처럼' <부손>.
이처럼 하이쿠는 짧고 함축적이기에 작품에 내포된 의미를 독자는 다양하게 해석의 공간을 갖게 된다.
독서가 그러듯 각자의 경험 미학에서 나오는 배경 지식이 17자로 만나면 지구본을 돌리는 기분, 언어 우주를 넘나드는 느낌이다. 우주는 아주 미세하고 광활하다. 밤바다처럼 고요하다. 불타는 장작처럼 격정이다. 이것들이 들어 있는 하이쿠를 독자는 사랑하게 된다.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하이쿠의 영향을 받은 시를 섰다. 미국은 60년대부터 하이쿠가 좋은 반응을 받으며 대중화된 장르다. 미국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다.
2019년 타임스는 하이쿠 시를 독자에게 공모, 타임스에 연재하기도 했다. 미국인이 일본 여행 때 오래된 정원의 벤치에서 하이쿠를 짓는 것을 일본의 방송사가 인터뷰하여 보여준 적도 있다.
하이쿠는 철학계도 적지 않는 영향을 주었는데 구조주의 철학의 대표주자 한 명이었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일본의 하이쿠에 강한 인상을 받아서 그의 철학을 완성 시켰기 때문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시는 압축이 생명이다.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생각되는 대로 글을 푸는 다른 문학과는 차별성이 있다.
우리는 이미 일상이 하이쿠의 시대에 살고 있다. SNS를 통한 표현과 주장은 가장 짧은 표현으로 나의 의견을 제시하게 된다.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은 짧은 SNS 문장을 이용하여 높은 지지를 받았다.
한국인이 즐겨 사용하는 것은 카톡이다. 여기에 표현되는 것들이 하이쿠의 하나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카톡의 문장이 나라를 혼란에 넣는다. 하이쿠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하이쿠가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를 넣는 철학이 요구된다. 말의 유희는 늦은 시대의 산물이다. 인생과 자연의 뛰어난 형태 언어를 사용하면 너와 나의 소통은 향연(饗宴)이다.
- 최창일 시인(이미지 문화 평론가)
i24@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