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폭풍은 바깥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안에서 일어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노왕의 오판과 자멸의 비극을 그린다. 그러나 이 비극은 단순한 실수의 기록이 아니다. 권력을 '자기 확장의 도구'로 삼는 인간 내면의 욕망을 극대화한 상징극이자, 정치를 미학적 폐허로 끌고 가는 언어의 무질서에 대한 경고문이다. 리어는 사랑을 언어로 증명받으려 한다. "누가 나를 더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자기 우상의 숭배를 강요하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마치 도널드 트럼프가 대중과 충성파 정치인에게 끊임없이 "나를 얼마나 지지하는가"를 시험하듯, 리어는 감정을 권력의 토대 위에서 요구한다. 트럼프의 언어는 리어의 언어와 닮아 있다. 분노, 단절, 모욕, 그리고 자기 신격화. SNS를 통한 짧고 공격적인 발언들은 리어의 폭풍 속 절규처럼 정치적 현실을 조롱하고 찢는다. 정치는 공동선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자아를 투영할 관객을 확보하는 연극 무대가 되어버렸다. '리어왕'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왕국이 실제로 분열된다는 사실보다, 그 분열이 언어와 관계의 붕괴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고네릴과 리건은 아버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1960∼1970년대 항구도시 전남 목포의 중심지였던 목포 오거리에 문학 시비(詩碑)가 건립됐다. 이 시비는 목포 오거리의 문화 역사를 되살리기 위해 출향 인사와 시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첫 민간 문학비다. "창에 불이 꺼지면 / 가로수 밑에 밤이 열리네." 시(詩) 한 줄이 도시를 걷는다. 그 문장 하나가 돌이 되어 땅에 박히는 순간, 도시의 기억은 한층 깊어진다. 지난 6월 10일, 전남 목포의 중심, 오거리에는 권일송 시인의 시 '오거리 샹송'을 새긴 시비가 세워졌다. 검은 오석에 새겨진 그 시비는 한 편의 노래처럼, 사계절을 지나온 도시의 감성을 품고 다시금 부른다. 목포, 그리고 오거리! 이름만으로도 수많은 사연과 풍경이 동반되는 곳이다. 1960~70년대, 목포 오거리는 활력과 낭만, 그리고 시와 노래가 교차하던 거리였다. 다방에서는 배동신 수채화가, 서희환 서예가 등의 시화전이 끓이지 않았다. 목포의 눈물 이난영이 걷는 이국적 항구의 리듬과 바닷바람, 이방인을 감싸던 포구의 따스함이 교차하던 그곳에, 이제는 하나의 시가 새겨져 그 시절의 정서를 되살리고 있다. 권일송 시인의 '오거리 샹송'은 단순한 회상의 시가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당신이 시를 읽지 않는다면,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알파빌'(Alphaville) 영화의 대사다. 1965년, 프랑스 누벨바그(Nouvelle Vague, 새로운 물결)의 거장 장 뤽 고다르는 독특한 미래 도시를 설계한다. 물론 영화에서다. 그 도시는 우주선도, 홀로그램도, 로봇도 없다. 우리 곁의 풍경, 사무실, 호텔, 거리의 표정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제목은 '알파빌'. 시(詩)를 말할 수 없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시(詩)를 회복하려는 인간의 투쟁이다. 60년 전 컴퓨터가 그리는 초지능의 과학 영화가 시를 주제로 만들어진 것이 독특하다. 시를 사랑하는 프랑스 영화문화를 알게 한다. 한국의 시도반(詩道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알파빌'은 감정이 금지된 세계다. 이 도시는 초지능 컴퓨터 '알파 60'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다. 감정과 예술, 시와 사랑은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요소로 취급된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 사전에서 삭제되면, 그 단어를 말하는 자는 함께 사라진다. 언어의 실종은 곧 인간성의 제거다. 60년 전 영화지만 지금에도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다. 주인공 르미 코숑은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사진은 세상의 표정이다. 유럽 각지의 거리에서 사람과 우연한 순간을 포착한다. 그들에게 삶과 비밀 이야기를 메일로 요청도 한다. 그들의 의견 속에서 위안과 공감을 찾아가는 프로젝트 예술이다. "우연을 통한 연금술"이라는 표현으로 설명되며, 공감 가능한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 사진작가 중 한 명이 '위성환' 작가다. 프랑스 베르사유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de Versailles)에서 조형예술을 전공한 위성환 작가는, 사진을 단순한 기록 수단이 아닌 관계의 언어다. 공간의 감정화로 다루어 온 예술가다. 앵글 작업은 다름 아닌 탱고 사진이다. 로마, 파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밀롱가’ 현장에서 탱고를 추는 이들의 무언의 교감과 신체의 리듬을 포착해온다. 그는, 오히려 사진의 '순간성'보다 ‘맥락성’을 중시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탱고 작업은 단지 춤의 기록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공간과 감정의 호흡을 시각화한 탐구였다. 위 작가는 종종 “사진은 빛이 아니라 관계를 찍는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예술성의 앵글에 초점을 맞추는 위성환 작가가 이재명 대통령실의 사진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치킨과 악마>를 만났다. 김우 시인의 시집 제목에서 드러나듯, 시인은 현대 소비문화의 키워드를 시적 소재로 삼고 있다. '치킨'이라는 단어는 편안하고 가벼운 이미지다. '악마'는 그와 대비되는 불온함과 비의(秘義)를 내포한다. 극단적 언어 조합은 시인이 우리 시대의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일상 속 무심히 소비되는 사물들이 내면의 풍경과 닿아 있다. '치킨'이라는 일상적 사물이 ‘악마’라는 상징과 접 붙으면서 의미의 층위를 깊게 형성하게 한다. 시인, 김행숙, 김언, 장석남 등 현대 시에서 활발히 시도되었던 '사물 시학' 혹은 '감각 시학'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보다 대중적이고 감각적인 접근이 특징으로 나아간다. 치킨과 악마의 시집을 펴낸 김우 시인은 익숙한 말들을 낯설게 전환하는 의미의 재배치 능력이 뛰어난 완숙 토마토 같은 신예 시인이다. 치킨이라는 사물이 시인의 언어 안에서는 어떤 불편한 진실의 상징으로 탈바꿈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맛있는 치킨을 사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아빠,/ 아빠는 월급이 얼마예요?/ 우와 그렇게나 많아요 매일 매일 치킨 먹어도 되겠어요/ 깔. 깔. 깔./ 수퍼맨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나라를 북한에 바치는 자에게 표를 줄 수 없다. 버스에서 주부의 말이다. 투표로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한다. 확신에 찬 주부의 말은 시도반에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펼치게 한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를 정직하게 바라본 사람에 의해 다시 쓰인다." 글쓴이 이영희의 말이다. 그는 기자였고, 교수였고, 사상가였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에 '질문'을 던진 사람이었다. 우리가 아무도 말하지 않던 '분단의 논리'와 '이데올로기의 감옥'에 대해, 질문하고 답한다. 1970년 출간된 <전환시대의 논리>는 금기의 영역을 정면으로 다뤘다. 지금도 ‘그 책, 봤다’라는 말에는 묘한 울림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불편함 속에, 우리는 자주 외면해온 진실의 언어가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 책이 던지는 첫 질문이다. 우리는 왜 남북으로 갈라졌고, 그 상태로 고착되었으며, 그것을 마치 ‘운명’처럼 수용하게 되었는가. 이영희는 이렇게 묻는다. “이념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아니면 인간을 수단으로 만드는가?”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비판한다. 단순한 반미가 아니다. ‘왜 미국의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2006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한강 변에 나타난 돌연변이 괴물이 사람들을 해치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 이면에 자리한 메시지는 물리적 괴물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괴물성’이다. 괴물은 과학의 오만, 권력의 무능, 책임 회피의 집합체로 만들어진다. 영화 속 괴물은 강을 기어 다니며 사람을 삼켰지만, 우리 사회엔 지금, 언어로 사람을 삼키는 '사람괴물'이 넘쳐난다. 언어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언어가 점점 '괴물화'되고 있다. 혐오와 조롱, 비꼼과 편 가르기가 난무하는 SNS 공간, 정치인의 막말, 언론의 선정적 기사, 연예인의 무책임한 발언까지, 공적 언어는 더는 품격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 흉기와 같다. 말은 살을 에는 칼처럼 날카롭고, 누군가를 겨눈다. 때로는 개인을 집단 린치하는 데 동원되기도 하고, 때로는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해 사회를 왜곡시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괴물은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 영화의 괴물도, 사회의 괴물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무책임한 방치, 누적된 분노, 외면받은 상처, 그리고 체계적 부조리가 결국 하나의'‘형상'을 만들어낸다. 지금 한국 사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본지 편집국장) = 2025년 6월 3일, 제21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사상 초유의 상황 속에서 조기에 치러진다.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은 재임 중 국가 비상사태를 명분으로 한 일방적인 비상계엄 선포를 강행했으며, 이는 국회의 동의 절차를 무시하고 헌법상 권력 분립 원칙을 심각히 침해한 행위로 평가받았다. 헌법재판소는 이를 헌법 위반 및 국민주권 훼손 행위로 판단하고, 헌정 사상 두 번째 대통령 파면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역사의 한 페이지 앞에 서 있다. 이 같은 사태 이후 처음으로 치러지는 이번 선거는 단순한 정권 교체의 의미를 넘어, 국민주권의 회복과 민주주의의 복원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특히 오늘부터 시작된 사전투표에는 출근 전 투표소를 찾는 시민들, 가족과 함께 방문하는 유권자들의 모습이 이어지며 높은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오늘은 그 대통령선거의 사전투표 첫째 날이다. 전국 각지의 사전투표소에는 투표용지를 손에 쥔 시민들의 진지한 발걸음이 이어진다. 어떤 이들은 출근길을 잠시 멈춰, 또 어떤 이들은 자녀의 손을 잡고 투표소를 찾는다. 그들은 단지 한 표를 던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