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한국의 근간, 격동의 소식을 듣는 독일거주 학인의 편지다. 편지는 그리 흥미롭지 않다. 독일의 민주주의 벌판이 오늘에 이르게 된 과정을 소상하게 들려준다. "독일은 20세기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범죄 국가였던 나치 독일로부터 어떻게 오늘날의 가장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로 변화할 수 있었을까?”로 시작된다. 민주주의 들판의 여정은 단순히 제도의 변화나 외세의 개입이 아니었다. 독일 사회 내부의 성찰과 과거 청산, 교육, 그리고 법적·도덕적 책임의 수행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우선, 독일의 탈 나치 화(Entnazifizierung)는 단지 정치적 권력에서 나치 인물을 제거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연합국은 나치 지도자들을 국제법정에 세워 뉘른베르크 재판을 단행했고, 전쟁범죄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독일 내부에서 벌어진 '기억과 사과의 문화'다. 전후 세대는 자신들의 부모 세대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 침략전쟁, 인권유린에 대해, 묻고, 따지고, 반성했다. 정치가 아닌 시민사회와 지식인들이 주도한 이 '과거사 청산'의 흐름은 독일 민주주의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편집국장 =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각오로 글을 써야 한다. 영감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셔 비워야 한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소로의 속삭임' 중에서 5월의 첫날, 차 한 잔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며 문득 소로의 말을 떠올렸다. 이 말은 단지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조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삶 또한 봄처럼 영원히 계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는 깨닫는다. 사랑할 시간, 감사할 시간, 용서하고 화해할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를. 그래서 우리는 삶이 허락한 매 순간을 아끼고, 영감의 잔, 사랑의 잔에 담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음미해야 한다. 어느덧 2025년의 3분의 1이 흘러갔다. 지금까지가 한 해를 채우기 위한 준비였다면, 이제 시작되는 3분의 2는 본격적인 출발의 시간이다. 그 출발선에 선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이름처럼 우리 모두에게 귀한 선물 같은 달이다. 5월은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이 이어지는 '가정의 달'이다. 여기에 하나 더, '나눔의 달'이라는 의미를 더해보면 어떨까. 나눔은 결코 거창한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참기름(참깨)은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인도지역에서 경작되고 있었다. 참깨는 향유나 의약품으로 사용되었다. 참깨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한나라 시대부터 기름으로 사용한 기록이 나온다. 한국에 사용한 시기는 삼국시대 이전부터다. 조선 시대는 양반이 주로 사용했다. 동양권에 사용되던 참기름은 한류 바람이 불며 유럽의 나라들까지 식재료로 확산, 활용되는 실정이다. 한국에서는 참기름에 대한 인식은 식재료를 넘어 진실의 차원으로 불린다. '참 군인', '참기름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참기름이 던지는 뉘앙스는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완성하는 조미료의 이미지만은 아니다. 깊은 열과 압력을 견뎌낸 끝에 비로소 향기롭고 맑은 기름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참기름의 본질이다. 겉껍질을 태우고 불순물을 걸러낸 후, 한 방울씩 짜내는 그 정성스러운 과정은 진실하고 순수한 것만 남기려는 사람의 마음과 닮았다. 반면 '참 군인'이라는 말은 어떤가. 병영 안팎의 풍경 속에서 수없이 소비되는 '군인'이라는 단어가 '참'이라는 접두어 하나만으로 단번에 무게를 얻는다. 참 군인은 단순히 계급장을 달고 지휘하는 이가 아니다. 국가와 국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영화 '올빼미'는 조선 시대 궁중에서 벌어진 미스터리 사건을 펼쳐지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사실 사극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진실을 본 자와 외면한 자, 그리고 진실을 침묵하게 만드는 권력의 역학을 통해, 오늘날 정치와 사회의 거울로 다가온다. 특히 '말할 수 없는 진실'을 둘러싼 불안과 침묵, 시각장애인의 눈을 통해 드러나는 ‘역설적인 시선’은 현 정치 현실과도 절묘하게 겹쳐진다. 영화 속 주인공 경수는 앞을 보지 못하는 침술사다. 육체의 눈은 감겨 있으나 정신의 눈, 영혼의 눈은 열려 있다. 그는 왕세자의 죽음을 목격했지만, 말할 수 없다. 신분의 벽, 권력의 공포,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한계가 그의 입을 막는다. 진실을 둘러싼 싸움, 특히 권력형 부패 사건이나 선거결과를 부정으로 내모는 엉뚱 시선도 은유한다. 사건의 진실 공방에서 영화는 ‘경수’의 시선을 빌린다. 내부고발자, 양심선언자, 그리고 국민 개개인이 그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쉽게 침묵 당하거나 조롱받는다. 혹은 자발적 침묵으로 자신을 지운다. 침묵은 생존의 전략이자, 시대의 비극이다. 침묵이 부르는 역사의 참상을 올빼미는 흥미진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철면피(鐵面皮)'라는 말은 한자 그대로 '쇠로 된 얼굴 가죽'을 의미한다. 낯짝이 쇠가죽처럼 두껍다는 뜻이다. 뻔뻔스럽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이 말은 오늘날에도 정치인, 종교인, 그리고 때로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과 같다. 고전으로 여기는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 정조시대)의 <허생전>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철면피’라 부를 수 있을까? 허생전의 시대는 실학보다 성리학이 뿌리를 내렸다. 양반과 백성의 계급 차이, 행동이 정해져 있었다. 이런 성리학을 싫어했던 실학자는 소설로 성리학을 비판했다. 오늘날 성리학이 없어지고 실학의 시대로 착각한다. 실학의 근본은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다. 지금도 엄연하게 조선의 성리학이 존재한다. 기득권(권력자)은 양반행세를 하며 국민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조선의 시대와 다르지 않은 정신착란의 패륜이다. 허생전에 등장하는 허생은 묘한 인물이다. 글만 읽는 선비다. 가난했고, 아내의 구박도 들었다. 어느 날, 그는 돌연 집을 나와 변 부자에게 돈을 꾸어 과일과 말총으로 거상이 된다. 이 대목만 보면 그는 부단한 자기 혁신가요, 시대를 앞서간 경영 천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상가(喪家)의 개'라는 말은 논어 <양화편(陽貨篇)>에 나오는, 공자의 탄식 속 한 문장이다. 오늘의 후학은 공자의 논어 양화편을 꾸준하게 연구하고 있다. 정치의 현실에 벗어나 유랑하는 공자의 심중을 들여다보며 현실 정치와 비교도 한다. 공자는 기원전의 철학자다. 그런데도 공자의 논어는 현실의 정치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온다. 공자는 정치에 잠시 발을 들여놓는다. 정치는 춘추전국 시대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역사는 우연일 수도 있지만, 필연의 연속일 수도 있다. 공자는 처음부터 인문학에 속하는 시학을 공부하지 않았다. 법무부 장관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공자는 법무부 장관을 5개월 정도를 하고 마치 오늘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처럼 내팽개쳐지고 말았다. 공자는 정치를 벗어나 방랑자가 된다. 선학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들의 학문에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자 한다. 공자를 추종하는 제자는 한두 명에서 3천 명에 이르는 현학의 지지를 받았다. 그렇게 떠도는 공자에게 농부가 입바른 말을 한다. 바로 그 장면이 논어 양화편의 이야기다. 길을 잃고 상가(喪家) 앞을 떠돌던 개처럼, 갈 곳을 잃은 자신의 처지를 그렇게 표현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 1883~1931)은 말하는 시인으로 불린다. 칼릴은 종이를 앞에 두고 한숨을 쉬는 시인이 아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로 예언을 흩뿌리는 구도자다. 지브란의 '예언자' 주인공 알 무스타파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마을 사람들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말은 설교가 아니다. "사랑에 대하여 말하여 달라", "일과 노동에 대하여 말하여 달라", "자녀에 대하여 말하여 달라" 이때 지브란은 칠판 대신 하늘을 바라본다. 달빛처럼 흐르는 멋진 언어의 대답이 나온다. "당신들의 아이들은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 그들은 삶이 자기 자신을 갈망하는 아들딸이다." 말은 뭔가 심오한 것 같으면서도, 어디선가 한 무더기 바람이 불어와 귀를 간질이는 재치의 말 같기도 하다. 지브란은 똑똑한 철학자보다 고요한 연못 위를 걷는 광인처럼, 천천히 미쳐가는 예언자로도 보인다. '예언자'의 저서는 1923년에 나왔지만, 지브란의 언어는 2025년에도, 3025년에도 들리고 있을 것이다. 왜냐고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사랑은 너를 원하니 네 속 깊은 곳까지 부숴버리라는 것이다." 이런 말은 소크라테스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산책'과 '풍경'의 언어는 시인과 예술인이 선호한다는 분석도 있다. 산책과 풍경에는 넉넉한 여유가 걸어 다니기에 그럴 것으로 짐작된다. 수많은 시와 노래는 풍경과 산책 안에서 탄생 되었음을 주장해도 시비를 걸만한 위인은 없을 것이다. 요즘 말하고 싶지 않은 풍경이 있다. 계엄을 정리하는 헌법재판소에서 거짓말하는 풍경들이다. 그러한 가운데 탄핵을 마무리하는 변호사의 시간에 독특한 장면이 있었다. '시인과 촌장'의 노랫말 '풍경'을 인용하는 변호사다. 매우 이례적 풍경이다. 가시덤불로 비유하고 싶은 부류들에 거룩한 풍경의 노랫말을 인용하는 장순옥 변호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평소 풍경의 노래를 좋아하는 말로 변론을 하기 시작했다. 장 변호사는 가난한 대학 시절부터 턴테이블을 자취방에 놓고 음악을 좋아했다는 후문이다. 노래는 때때로 우리의 기억을 풍경으로 만든다. 어떤 노래를 들으면 특정한 장면이 떠오르고, 그 장면은 우리가 살아온 시간과 얽혀 있다. 시인과 촌장의 노래 ‘풍경’ 역시 그런 힘을 지닌 곡이다. 이 노래는 단순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사색과 감성이 녹아 있다.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