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폭풍은 바깥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안에서 일어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노왕의 오판과 자멸의 비극을 그린다. 그러나 이 비극은 단순한 실수의 기록이 아니다. 권력을 '자기 확장의 도구'로 삼는 인간 내면의 욕망을 극대화한 상징극이자, 정치를 미학적 폐허로 끌고 가는 언어의 무질서에 대한 경고문이다.
리어는 사랑을 언어로 증명받으려 한다. "누가 나를 더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자기 우상의 숭배를 강요하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마치 도널드 트럼프가 대중과 충성파 정치인에게 끊임없이 "나를 얼마나 지지하는가"를 시험하듯, 리어는 감정을 권력의 토대 위에서 요구한다.
트럼프의 언어는 리어의 언어와 닮아 있다. 분노, 단절, 모욕, 그리고 자기 신격화. SNS를 통한 짧고 공격적인 발언들은 리어의 폭풍 속 절규처럼 정치적 현실을 조롱하고 찢는다. 정치는 공동선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자아를 투영할 관객을 확보하는 연극 무대가 되어버렸다.
'리어왕'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왕국이 실제로 분열된다는 사실보다, 그 분열이 언어와 관계의 붕괴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고네릴과 리건은 아버지를 기만하고, 사랑이라는 말조차 권력을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미국 사회는 트럼프의 등장 이후 극단적인 양극화로 치달았다. 그의 언어는 민주주의의 기본인 타협과 존중을 파괴했고, '적대적 진실(hostile truth)'이라는 신조어를 남겼다. "당신이 믿는 것이 곧 진실이다"라는 선언은, 리어의 "나는 왕이다"라는 환청과 닮아 있다. 현실은 권력자의 감정에 종속되고, 진실은 정서의 노예가 된다.
셰익스피어는 리어를 광인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미치광이가 아니다. 자신의 몰락을 통해 인간 실존의 공허를 절규하는 철학자가 된다. 리어의 광기는 오판과 상처를 껴안는 존재론적 통곡이다.
트럼프에게서도 일종의 '광기적 일관성'이 보인다. 그는 미디어를 장악하며 스스로 '현대판 왕'이자 '진실의 화신'이 되기를 원했다. 백악관은 궁정이 되었고, 기자회견은 궁정의 광대 놀음이 되었으며, 허세와 과장이 리어의 왕관을 대신 썼다. 그러나 리어와 달리, 트럼프는 자신의 과오를 성찰하지 않는다. 그의 광기는 해석되지 않으며, 끝내 누구의 눈물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리어왕'은 어둡지만 완전한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리어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죽음을 통해 인간의 취약성과 연대를 보여준다. 그는 "우리는 잠시 세상을 견디다가 잠들어야 한다"고 말하며 딸 코딜리아와의 화해를 이룬다.
그러나 트럼프는 퇴장하면서조차 반성이나 화해 없이, 재출마를 예고하며 사라졌다. 그는 민주주의의 장례식장에 마지막 불꽃놀이를 쏘아올렸고, 그 불빛은 여전히 여러 나라의 대중영합주의 정치인들을 매혹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출마해 대통령이 되어, 새로운 비극을 그리고 있다. 리어가 뿌린 회한과 눈물은 보편적 인간성의 귀환이었지만, 트럼프의 행동은 자기중심주의의 굴레를 반복할 뿐이다.
'리어왕'은 정치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골적인 비판이 아니라, 시적 상징을 통해 인간 본성과 권력의 유혹을 탐구하는 문학이다. 시는 구조와 질서를 넘어선 감각의 언어이며, 이런 점에서 오늘날 정치 언어와 뚜렷하게 대조된다.
트럼프가 보여준 정치의 언어는 해체와 분열이었다. 진실은 거짓과 혼동되고, 소문과 음모는 사실을 압도했다. 리어는 광기 속에서 침묵의 지혜를 얻지만, 트럼프는 침묵을 알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외쳤고, 그 외침은 진실을 흐리는 소음으로만 남았다.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사랑을 말하는 그 입은 진실한가?"
"왕관을 쓴 자는 누구이며, 그것은 왜 무너지는가?"
그리고 우리는 트럼프를 보며 다시 묻게 된다.
"그는 왜 그렇게 외로웠으며, 왜 모두를 의심했는가?"
폭군은 외롭다. 그 외로움은 자신을 향한 사랑이 진심이 아닐까 두려워하는 내면의 공허에서 비롯된다. 리어는 그것을 마지막에야 깨달았고, 트럼프는 끝내 그것을 마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다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정치의 언어를 시의 언어로 정화해야 할 이유를 되새겨야 한다. 역사는 언제나 리어를 통해 지도자를 반추하게 하므로.

- 최창일 시인(이미지 문화 평론가)
i24@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