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해 스님과 동향인 한명구 감독은 24일 서울 충무로 한국의집 민속극장에서 제작 발표회를 갖고 "만해 스님의 발자취를 남아낸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은 올해 연말 개봉을 목표로 촬영 중"이라며 "좋은 배우들과 만해 스님의 업적을 잘 담아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외에도 안병경·김형일·김동현·노현희·이소망·성아연·최종문·김은정·이지연·현정아·연두홍·올리비아킴·유영미·최영철·김상천 등 유명배우들이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에 캐스팅됐다.
영화사 (주)시네마서울 관계자는 "이번 영화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은 3.1운동 100주년 기념 영화로 만해 스님의 선양 및 국민적 공감대 형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전국적인 홍보효과로 관광활성화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파급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한 지난 4월 13일 서울 라마다호텔에서 열린 '2019 대한민국 베스트 브랜드 대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영화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 만해 한용운(1879년~1944년)은 독립운동가인가 하면 시인이요, 시인인가하면 대 사상가요, 대사상가인가면 어느새 독립운동가로 변해 버린다.
2. 타이틀 빽 : 고찰 강원도 인제에 위치한 백담사에서 삭발 수계식을 하는 만해(27세), 경건하게 출가를 한다.
3. 홍주성(지금의 홍성)에서 동학란(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다. 16세의 몸으로 동학란에 참여하는 하는 소년 만해, 1천냥을 탈취하여 군자금으로 보내는 활동을 한다.
4. 그러나 관군에게 쫓기는 몸이 된 만해는 2년 동안을 전국 사찰(범어사 통도사, 수덕사, 천마사, 표선사, 융흥사 등)을 순례하며 수련을 한다.
5. 19세가 되던 해 만해는 오세암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하며 팔만대장경을 독파 한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6.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출생한다(본명 정옥/아명 유천).
7. 어린시절(회상) 5세부터 신동으로 다른 아이들은 천자문을 공부할 때 어린 만해는 한학 '대학', '통감' 등을 통달한다.
8. 14세 되던 해에 만해는 풍습에 따라 혼례(초혼 신부 전정숙)를 한다.
F.O
9. 25세가 되면서 혼란한 조선을 위하여 무언가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러시아 해삼위(블라디포스톡)으로 갔으나 일본 일진회 회원으로 오인을 받아 쫓겨나듯 귀국을 한다.
10. 27세에 백담사에서 수계를 한 후, 정식으로 출가를 한다(한정옥이라는 속세 명은 버리고 법명은 '용운(龍雲)'으로 이름이 지어 진다).
11. 그 후 29세에 설악산 신흥사, 건봉사에서 수거 안거를 하며 선을 닦는다.
12. 30세에 전국승려자대표로 일본 견학을 가서 일본 각지를 다닌다.
13. 33세 되던 해,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기 위하여 만주 동북삼성에 들어가서 일본 고위층 암살 작전에 가담하는 독립 운동에 기여를 한 뒤 귀국을 한다.
14. 41세에 기미년 3.1 운동에 독립선언서를 33인 대표로 발표를 한 뒤 구속을 당한다. 서대문 형무소에 감금하여 유관순을 만나면서 공감을 형성한다.
15. 갖은 고문 끝에 만해와 유관순은 각각 징역 3년, 5년형을 받았지만 유관순은 끝내 장염으로 옥사를 한다.
16. 출옥 후 만해는 논문, 소설, 시 등을 쓰며 지내다가 '님의 침묵'을 발표한다.
17. 51세 되던 해, 광주학생운동사건이 전국적으로 확대하자 만해는 뒤에서 학생운동을 후원하다가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는다.
18. 55세 되던 해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에서 만해는 재혼(유숙원)을 한다. 아내의 삯바느질 등으로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만해는 집필과 함께 창씨 개명운동 반대,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운동 등에 참여를 하며 일제에 항거를 계속한다.
19. 1944년 만해는 66세를 일기를 입적을 하고 만다.
20. 에필로그 : '님의 침묵' 시가 흐르면 만해의 업적이 하이라이트로 소개 되면서 자막이 흐른다.
한편, 1926년 발표한 만해 한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은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최초의 근대시인, 최고의 시민문인, 저항시인으로 위치하게 하였다.
만해 스님은 불교개혁을 통한 사회개혁과 독립투쟁을 병행하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나 독일의 반나치 문학보다 한 차원 승화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1930년대 후반기에는 ‘후회’, ‘철혈미인’, ‘박명’ 등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만해 스님은 노년에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경제적 고난 속에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면서도 창씨개명 반대와 학병 출전 반대운동을 펼치며 꿋꿋한 지조와 절개로 ‘풍란화의 매운 향내’를 잃지 않았다.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에서 66세로 서거하였다.
i24@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