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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창일 시인, 시비(詩碑)는 독자의 마음이 세운다

남산의 소월에서 도시샤의 윤동주까지, 돌에 새겨진 한국 현대시의 정신사
한국 현대 시비의 계보와 문학비가 아닌 '기억의 비석'으로서의 시비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한국 현대 시비의 효시는 김소월(金素月)이다. 1968년 한국일보사 주관으로 서울 남산에 소월의 시비가 건립됐다. 일명 소월길이다.

'진달래꽃'을 새긴 그 돌은 한국에서 최초로 공공장소에 세워진 근대 시인의 시비로 기록된다.

시비(詩碑)가 처음 세워진 장소가 남산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도성의 안산(案山)이자 서울의 상징인 그 산은 오래전부터 한국인의 정서가 모이는 곳이었다. 그 자리에 소월의 '진달래꽃'이 새겨졌다는 것은, 당대 사람들이 이미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시가 무엇인가'를 직감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진달래꽃'은 1922년 <개벽>에 발표된 이후 백 년이 넘도록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살아 있는 시다. 7·5조 민요조 리듬과 이별의 정한을 억누르면서도 꽃을 뿌리는 역설의 미학은 어느 시대에도 낡지 않았다. 시비는 문단이 아니라 국민이 먼저 알아본 시의 자리에 세워진 셈이다.

집계 가능한 범위에서 단일 작품으로 가장 많은 시비를 거느린 시인은 윤동주(尹東柱)다. 그의 '서시'는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1968년 건립)를 비롯해 원주 미래캠퍼스, 일본 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 우지 강변 등에 각각 독립된 시비로 서 있다. 하나의 시가 국경을 넘어 여러 나라에 돌비로 존재하는 사례는 한국 시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연세대 시비는 윤동주의 친동생이자 건축학자였던 윤일주 교수가 설계했다. 형의 시를 돌에 새기며 아우는 건축으로 헌시를 올린 셈이었다.

훗날 일본 도시샤대학에 세워진 시비 역시 그 설계를 따랐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청년이 한글로 쓴 시가 훗날 그 식민 지배국의 대학 캠퍼스에 새겨졌다는 사실은 문학이 역사를 어떻게 넘어서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서시'가 오늘날 일본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는 사실은 그 의미를 더욱 깊게 한다.

정지용(鄭芝溶)의 경우는 또 다른 의미에서 특별하다. 그의 시비는 국내 옥천 생가 인근과 충북 여러 지역에 세워져 있을 뿐 아니라, 일본 도시샤대학에도 '향수' 시비가 따로 세워져 있다.

2005년 윤동주 시비 바로 곁에 건립된 정지용 시비는 두 시인의 문학적 인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윤동주가 가장 존경했던 시인이 정지용이었고,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정지용이 썼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스승의 시와 제자의 시가 같은 캠퍼스에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은 한국 현대시의 정신적 계보를 돌 위에 새겨 놓은 것과도 같다.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 시비는 또 다른 분포를 보인다. 그의 시비는 문학관이나 공원뿐 아니라 만해 사상을 기리는 사찰과 독립운동 기념 공간을 중심으로 전국에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었던 그의 삶 때문이다. 이 경우 시비는 단순한 문학비가 아니라 독립운동 기념비의 성격을 함께 지닌다. 한 인물의 시와 역사가 한 돌 위에 함께 새겨져 있는 셈이다.

시비의 숫자는 결국 독자의 마음이 만들어낸 수치다. 어떤 시인의 어떤 시가 돌에 새겨진다는 것은 문단의 평가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독자들이 사랑하고 기억하고 다시 찾은 시만이 비로소 돌에 새겨진다.

시비는 시인이 세운 것도 아니고 문단이 세운 것도 아니다. 결국은 독자의 마음이 세운 것이다.

남산의 소월에서 연세대의 윤동주, 그리고 일본 도시샤대학의 윤동주와 정지용에 이르기까지, 시비는 한국 현대시의 지도가 된다. 돌에 새겨진 시들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서와 한 민족의 기억이다. 시비는 문학비가 아니라 기억의 비석이다.


- 최창일 시인(이미지 문화평론가)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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