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월간 '차의세계'(발행인 최석환)는 지난 3월 24일 중국 쓰촨(四川) 성 불교협회 부회장인 따이은(大恩) 스님과 최석환(崔錫煥) 한국국제선차문화연구회 회장과 신라왕자 무상선사(無相禪師·684~762)의 사리탑을 찾아 펑저우(彭州) 단징산(丹景山) 금화사(金華寺)에서 무상선사 사리탑을 최초로 확인하고 2019년 '차의세계' 4월호에 무상선사 사리탑 관련 내용 일체를 공개했다고 16일 밝혔다.
최석환 회장은 "이번 사리탑 발견은 2001년 10월 중국 오백나한(五百羅漢) 중 455번째 조사(祖師)에 오른 고 무상공존자 발견 이후 18년만의 쾌거"라며 "무상선사의 오백나한 발견 이후 열반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펑저우 단징산에 무상선사 사리탑이 현존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현지조사 과정에서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이어 "10여 년 전 금화사 김두타원(金頭陀园)의 20여기의 사리탑 군은 펑저우시의 자연보호 정책에 훼손되어 버렸다"며 "이번에 펑저우시는 한중 무상선차연토회를 열고 김두타(金頭陀, 무상선사) 사리탑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한중양국의 선차문화를 촉진시킬 전망"이라고 말했다.
김두타(金頭陀) 사리탑 복원의 역사적 의미
무상선사에 대한 현창 복원사업이 중국인민정부 민정국(종교국)에 의해 대대적으로 시작되어 동아시아 불교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현창사업은 최근 10년간 방치된 무상선사의 부도를 새롭게 단장함으로써 비롯됐다.
이 사업으로 중국 사천지방에서 두타행으로 유명했던 무상선사는 해동 제일의 두타선사로 자리매김하는 한편 원효 이후에 동아시아 최대 선승으로 추앙받을 전망이다. 무상선사는 특히 '선차지법(禪茶之法)'을 통해 차(茶)와 선(禪)이 하나가 되는 동아시아 차 정신의 비조(鼻祖)로서 자리 잡은 바 있다.
최 회장은 "무상선사는 돈황문서 무상오경전(1908년) 오백나한(2001년) 동아시아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며 "계속적으로 유적이 발굴됨에 따라 앞으로 점점 부각, 조명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두타(金頭陀)는 누구인가?
당 현종(唐玄宗 李隆基, 685년 9월 8일~762년 5월 3일)의 여동생인 금화공주가 쓰촨 펑저우 단징산으로 들어가 금화행궁으로 사용했는데 금화공주가 출가하여 무상의 법력에 감화되어 금화행궁(金華行宮)을 금화사로 바뀌었다. '금화사기'에 금화사의 개산조사를 김두타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김두타는 무상선사를 지칭하는데, 김화상(金和尙), 전선사(全禪師)로도 불렸다. 금화사개산조사에 오른 무상은 차나무와 모란(목단)을 심고 '선차일미(禪茶一味)'를 실천했다.
중국 당·오대 시대 고승의 전기를 집대성한 책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762년 나이 77세로 열반에 들었는데 무상의 열반처가 확인되지 않았으나 무상연구가인 최석환 한국국제선차문화연구회 회장에 의해 10년간 무상 열반처를 추적한 끝에 이번에 금화사로 처음 밝혀졌다.
무상 사후 130년 만에 사천절도사 유종영이 나와 쓰촨 삼대현 혜의정사에 사증당비를 세우고 삼휴각에 무상-마조-무주-서당지장을 모신 영당이 세워졌다. 그처럼 무상선사는 중국에서 남종도 북종도 아닌 정중종을 열어 그 문하에 마조도일이 나와 당대 선종을 이끌었다.
908년 영국의 탐험가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에 의해 돈황문서가 발견되면서 무상선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육조 혜능계를 고집해온 한국 선종계는 무상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중국의 호적 박사와 태안사 조실을 지낸 강청화 스님은 태안사에 정중당을 세우고 무상의 염불선을 선양했다.
그밖에도 연세대 교수를 지낸 민영규 등에 의해 무상법통설을 주장했다. 그런데도 무상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다가 2001년 10월 월간 '선문화'를 통해 무상선사가 중국 오백나한 등 455번째 조사의 반열에 오른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후 2004년 중국 쓰촨 대자사에 '무상선사 행적비'와 무상선사를 추모하는 학술대회가 잇달아 개최되었고 중국 CC-TV가 '목면가사를 찾아서'와 KBS가 다큐멘터리로 '선의 황금시대를 열다'를 방영하면서 무상 마조로 이어진 법통설을 제기했다.
그 후 무상 관련 논문 50여 편과 1992년 '정중무상선사', 2009년 변인석의 '정중무상대사', 2010년 최석환의 '정중무상평전' 등이 잇달아 출간, 무상 신드롬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오백나한에 오른 무상공존자
2001년 10월 월간 '선문화'를 통해 무상선사가 중국 오백나한 중 455번째 조사에 오른 사실이 알려지면서 중앙 일간지는 무상의 존재를 대서특필했다.
베이징연산출판사에서 펴낸 '오백나한'에서 무상선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당 신라국(조선) 왕자, 속성은 김씨, 법호가 무상 또는 김화상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현종 개원 16년(728)에 중국에 들어와 덕순사의 자주처적 선사에게 득도한 이래 자주의 여러 곳을 찾아 두타행으로 선정을 닦고 청두 정중사에서 대중을 교화한 지 20여 년 뒤에 정중종의 조사가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무상공존자라고 불렀다(唐代名僧 新羅國(朝鮮)王子 俗姓金 法號無相 又称金和尙. 少年出家爲僧 唐玄宗開元十六年(728年) 來中國. 游行巡訪 往步入蜀 拜資州德純寺處寂大和尙爲師 學得黃梅禪法. 之后潛入資州深溪山中修頭陀行 身穿百衲衣 乞食度日 每天只在午前進食一次 然后到空曠的山林中修禪. 結束頭行后 于成都淨衆寺開法 講說佛法二十餘年 蜀中百姓敬之若聖).
무상선사 오백나한 발견 이후 18년 만에 처음 발견한 무상의 사리탑은 무상선사가 당현종으로부터 밭 1천 무를 하사받고 정중사, 대자사, 보리사 등을 세우고 정중종을 일으켜 달마의 선종의 가사와 정중종으로 이어졌다고 돈황출토 문서인 '역대법보'에 전하고 있다.
1200년 만에 찾아낸 무상의 사리탑
쓰촨 펑저우 단징산 금화사 김두타원에 1200년간 보존되어 온 무상선사의 사리탑을 위시하여 20여 기의 탑전이 조성되었는데 10년 전 자연보호훼손이라는 펑저우시 정부의 지시로 사리탑군이 폐허로 남겨졌다.
당시 탑이 허물어지면서 사리함을 별도 보관하였는데 3월 24일 금화사 주지 굉오 스님이 사리 보관함을 열고 공개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펑저우시 정부는 사리탑을 복구하여 한중문화교류의 상징으로 발전시켜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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