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과 눈물사이' 시집은 권일송(1933~1995. 순창출신) 시인이 1980년대 말쯤에 발표한 작품이다. 70~80년대 시인들은 늘 시대와의 불화 속을 거니는 시간들이었다. 그들이 마시는 한 잔의 소주는 시대의 항거였다. 어느 골목이던 시인이 자리한 술집은 독립투사들이 모이는 만주의 들판이다. 바람이 일고 황량하다. 한잔의 소주잔에는 만주벌판을 달리는 칼바람소리가 들어있다.
권일송 시인의 '바람과 눈물사이' 세 번째 페이지에 올려 진 시 한편은 70~80년대 그날의 함성이 들린다.
과녁을 조준(照準)하라!/ 무너지는 복판을 향해/ 아우성치며 달겨드는/ 반란의 니그로들/늪에 갇힌 것들은 모조리 일깨우고/ 소리 나지 않은 종을 울려서/탄생의 아픈 순간에 세우노니/울어라 씽씽 마파람이여 / 살갗이 터져서 아픈 울음을/속으로 도져서 으깨신 몸살을/ 망각의 들판 위에 흩뿌리는가/ 아이야야얏… /선비피 낭자한 옥양목 하늘/ 쇳소리 한 마당 풀무질 한 채/ 사납게 일렁이는 바람의 기둥('회초리' 시 전문)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70년대를 살아온 시인의 노래는 사나운 내출혈의 연대를 기록한 시다. 80년에 들어와 회복기(恢復期)의 병실이라 말한다. 사실이 시인에게는 70년대 혹독한 군사정권을 거치며 독한 소주가 시인의 장기에 항거를 했다. 결국 시인은 독주의 저항에 장기(臟器)는 무너지고 병실의 신세를 졌다.
70~80년대의 시인에게는 언어를 통한 하나의 새로운 인식에 다다르고, 존재 전반에 걸친 '정신의 개입'이 심화된 시기에 결국 술을 끊었다. 이것은 시인의 장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시인에게 술의 상실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헛되고 헛된 세상의 소용돌이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비비추(여름 풀꽃)의 영롱한 눈짓…"
시인이 말한 '비비추'는 시인이 사랑한 꽃 시다. 그의 고향 순창의 뒷산에는 시인의 '반딧불' 시비가 있고 하얀 비비추가 피고 있다.
세 명의 아들(훈, 찬, 혁)은 권일송 시인의 기일에 비비추 시를 소리 내어 돌려가며 낭송한다. "시인의 거리에는 눈물꽃이 메마를 날이 없어도 내 맘에는 늘 위안과 환희 잔치가 넘치고 있었다"고 말했다.
시인의 시간은 늘 변신과 시인의 소중한 삶의 가치를 기운으로 이겨내려 온갖 힘을 기우렸다. 어느 날이었다. 같은 문중의 권정달 정치인이 시인을 찾았다. 당시 시인은 현대경제 논설위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문중의 임원인 권정달은 조국을 위하여 일을 해보겠다며 포부를 말했다.
그러면서 민정당 사가의 작사를 부탁했다. 같은 문중의 중심에서 일하는 어른의 말에 권일송 시인은 고민, 작시를 해주기로 덜컹 약속을 했다. 그 후 민정당 사가는 김동진 교수가 작곡을 하여 노래가 되었다.
시간은 흘러서 전두환 정권은 1980년대 5.18이라는 참혹한 비극을 만들었다. 앗차! 싶은 권일송 시인은, "내 시의 가방!" 하고 소리를 쳤을 때는 이미 시간이 늦었다.
권일송 시인은 무차별하게 시의 가방을 군사정권에 뺏기는 신세가 되었다. 세상은 권일송 시인을 향하여 군사정권에 협조한 시인이라고 돌 팔메를 날렸다.
정말이지 환장하고 나자빠질 일이다. 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이 나기 전 누가 알았겠는가. 권일송 시인은 개인을 통해서 역사와 현실을 수렴해야 할 외로운 항해가 시작이 되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혁명과 같았던 시인에게 다시 소주의 독주는 언어의 벽을 다시 타야만 했다. 벽은 뛰어넘어야 벽이다. 늘 새로운 발성법으로 그날을 항거했지만 사람들은 권일송 시인의 서글픈 세상을 알아주려 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시인의 가방을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권일송 시인은 전두환 정권의 사죄를 받지 못하고 1995년 향년 66세로 별이 되었다. 가성(假聲)이 판을 치는 세상, 권일송 시인이 못다 마신 소주잔에 이 땅의 시인은 바람과 눈물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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