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시는 언제나 청정(淸淨)을 지향한다. 꾸밈없는 언어로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고, 권력이 외면한 자리에서 목소리를 낸다. 시인은 아름다움을 노래하되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의 윤리이며, 시가 수천 년을 살아남은 이유다.
2026년 4월, 이재명 대통령은 SNS를 통해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인권 침해 영상을 공유하며 "유대인 학살이나 전시 살해와 다를 바 없다"고 밝혔다. 즉각 외교적 파문이 일었다. 이스라엘 외교부는 강하게 반발했고, 국내 야권은 ‘SNS 외교 참사’라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러나 시인의 눈으로 이 발언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인다. 알자지라(Al Jazeera)는 해당 영상을 자체 검증한 뒤, 2024년 9월 요르단강 서안 카바티아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팔레스타인 남성의 시신을 옥상에서 밀어 떨어뜨린 실제 사건임을 확인했다. 이를 두고 알자지라는 "문서화된 학대에 대한 우려 제기"라고 표현하며, 사실 기반의 인권 문제 제기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AFP 통신 역시 이 대통령의 발언을 보편적 인권에 대한 호소로 담담하게 전달했다. 한국 외교부의 입장- "특정 사안에 대한 의견이 아니라 보편적 인권에 대한 신념의 표명"-을 인용하며, 이번 논쟁의 본질이 외교적 결례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가치를 둘러싼 시각 충돌임을 시사했다.
시도 그러하다. 진정한 시는 강자의 문법으로 쓰이지 않는다. 김수영은 "풀이 눕는다"고 했고, 백석은 혹한의 들판에서 민초의 삶을 노래했다. 그들의 시가 불편했던 이유는 시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시가 정직했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외교 언어 특유의 완곡함을 벗어나, 시적(詩的) 정직함으로 말을 건넨 순간에 가깝다. 그는 위안부 강제 동원과 전시 학살을 같은 반인류 범죄의 맥락에서 연결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피식민과 피학대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은 민족이, 같은 고통 앞에 침묵하지 않겠다는 역사적 연대의 선언이다.
추미애 의원이 SNS에 적었듯, "과거 만행을 부정하는 일본을 상대로 우리의 인권 회복 노력에 국제적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서라도 국제인도법적 목소리는 필요하다." 이 발언은 이번 논쟁을 넘어 한국이 어떤 가치 위에 서야 하는지를 되묻게 한다.
보도에 따르면, 이 대통령의 발언에 외신 언론인들 사이에서는 "놀랍다"는 반응이 나왔다. 강대국의 핵심 동맹국을 향해 공개적으로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중견국 정상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시가 가진 힘이다. 시는 세력의 크기가 아니라 진실의 무게로 말한다.
시화무(詩畵舞)는 시·그림·춤이 하나의 감동으로 수렴하는 통합 미학이다. 시가 언어로, 그림이 형상으로, 춤이 몸으로 같은 진실을 말할 때 예술은 완성된다. 외교 역시 그러하다. 언어(발언)와 형상(행동), 그리고 몸(국가의 역사적 정체성)이 일치할 때 비로소 그 목소리는 진정성을 얻는다.
이번 발언은 절차의 완벽함보다 가치의 일관성을 택한 순간이었다. 물론 영상 출처 검증의 미흡함과 발언 시점의 적절성 문제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시인이 언제나 완벽한 언어로만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거친 언어와 서툰 타이밍 속에서도 진심은 더 선명하게 빛난다.
한국이 진정 ‘목소리 있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번 한 번의 발언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시가 한 편으로 완성되지 않듯, 인권 외교 역시 지속과 일관 속에서 신뢰를 얻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출발은 있었다는 사실이다. 침묵하지 않았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시의 첫 행이다. 시는 완성된 세계를 노래하지 않는다.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향해 먼저 말을 건다.
대통령의 발언이 그러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적이었다.

- 최창일 시인(이미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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